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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75화
PAYLUA ORIGINAL · 제175화

175화. 백재헌의 빈손

빚을 먹는 금고 · 2,563자

오프라인 책장
백재헌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우빈은 과거 서류에 남은 대표 전화번호가 현재 누구에게 할당됐는지부터 확인했다. 이미 해지된 번호였고, 동림기록을 거쳐 이어진 회사들의 연락처에는 동명이인이 여럿 있었다. 누군가가 ‘백재헌입니다’라고 말한다 해도 곧바로 1996년 시험 책임자라는 뜻이 될 수 없었다. 그 대신 도영식이 연락해 왔다. 오래전 우빈의 가족을 빚으로 몰아붙였고, 첫 금고를 가져오게 만들었던 사채업자였다. 그는 휴대전화 너머에서 특유의 느긋한 말투를 찾지 못했다. “그 푸른 상자, 아직 못 찾았지?” “도영식 씨가 왜 그걸 묻습니까?” “나한테도 찾으라고 하더라고. 안 찾으면 내 장부에 네 가족 이름을 다시 적겠대.” “누가요?” “검은 양복. 그런데 이상해. 내가 만난 그 남자는 지난번하고 얼굴이 똑같았어.” 우빈은 연화빌라 지하에서 보았던 환영을 떠올렸다. 1996년 장면 속 검은 양복의 남자 역시 지금과 같은 얼굴이었다. 그가 늙지 않는 것인지, 금고가 사람의 얼굴을 빌리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상자를 찾으면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열쇠를 받으래. 서류는 나중에.” “그럼 절대 가까이 오지 마세요. 도영식 씨에게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도영식이 피식 웃었다. “당한 뒤에도 나한테 그런 말을 하네.” “당한 사실은 안 없어집니다. 당신이 한 짓도요. 그렇다고 누가 시키는 대로 또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게 둘 순 없어요.” 우빈이 통화를 끝내자 소라가 물었다. “믿어요?” “아뇨. 그래서 그의 말도 별도 단서로만 기록했어요.” 소라는 도영식의 음성 메시지를 다시 재생했다. 그가 겁에 질렸다는 사실이 그의 말을 진실로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처음 금고를 가져오던 때처럼 다른 사람의 빚을 미끼로 이용당하고 있다면, 또 다른 피해가 생길 가능성은 있었다. “저 사람을 믿지 않아도 경고는 할 수 있죠.” “그렇죠.” 우빈이 말했다. “반대로 저 사람이 도와줬다는 이유로 전에 한 일이 없어지지는 않아요.” 소라는 대답 대신 서랍에서 옛 사건 고소 자료를 꺼냈다. 도영식의 불법 추심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의 진술이었다. 그중에는 아직도 빚을 다 갚았다는 증거를 찾아다니는 노인이 있었다. 우빈은 그 파일을 닫지 않았다. 앞으로 싸움에 도움이 되는 정보가 있다고 해도 도영식에게 책임을 면제하는 거래를 제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도영식은 자신이 있던 차 안에서 빈 담배 갑을 구기고 있었다. 앞유리에 반쯤 비친 검은 양복의 남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열쇠만 가져오면 당신에게 붙은 숫자가 지워집니다.’ 도영식은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 금고를 팔던 날 자신이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박현정 앞으로 1996년 관리자가 보낸 것으로 주장하는 전자 문서가 도착했다. 발신자 이름은 백재헌이었다. 문서에는 ‘푸른 외함이 이미 정당하게 수령됐으므로 현재 보관자가 열쇠를 제출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하단에는 서명이 있었지만 발신 인증 내역은 없었다. “본인이 보낸 건지부터 모릅니다.” 현정이 말했다. 정우빈은 첨부된 사진을 확대했다. 누군가 오래된 사무실 책상에서 손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시계와 회색 소매, 손바닥 위에 아무것도 없는 모습. 파일명은 ‘BJH_수령완료’였다. “수령했다는 사람이 빈손을 찍어 보낸다고 증거가 되는 것도 아닌데.” 소라가 코웃음 쳤다. 그 순간 사진 속 손바닥이 움찔했다. 손가락이 구부러지더니, 검은 종이 조각 하나가 피어난 듯 솟았다. [미수령 보존 장치 / 강제 반납 절차] [열쇠 보관자: 정우빈] 우빈은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검은 종이가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열쇠를 향해 기어왔다. 소라는 즉시 열쇠를 덮지 않고 우빈과 거리를 벌렸다. 현정은 급히 종이에 기재된 절차와 실제 회사의 법적 반납 청구를 구분해 두었다. “이런 표시 하나로 우리가 넘길 이유는 없어요.” 금고에서 검은 손가락이 길게 뻗어 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우빈은 도망치거나 금고에 다른 서류를 집어넣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열쇠를 가져오게 된 경위와 보관 장소를 기록하고, 함부로 누구에게도 전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신이 정말 백재헌이라면,” 우빈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받았는지 설명하면 됩니다. 빈손 사진이 아니라 그날의 인계 기록으로요.” 사진 속 손이 멈췄다. 손바닥의 검은 종이가 바스러졌다. 잠시 뒤 새 문장이 떴다. [백재헌 / 실물 수령 증명 실패] [대체 증명 요청 대상: 오세림] 오세림의 침묵을 기한으로 몰아세우던 장치가 이번에는 그 침묵을 백재헌의 증거로 쓰려 하고 있었다. 그날 자정, 우빈에게 첫 금고가 속삭였다. ‘그 여자는 지금까지 혼자서 푸른 문을 잡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라는 말을 잊지 마세요.’ 마지막 단어가 끊어진 직후, 현정에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저는 오세림입니다. 공개된 번호로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 먼저 제0제작소의 1996년 10월 2일 출입 기록을 확인해 주세요.’ 우빈은 그 문자에 곧바로 답장을 쓰지 않았다. 진짜 오세림인지 확인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그녀의 주소를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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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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