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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73화
PAYLUA ORIGINAL · 제173화

173화. 지워진 납품일

빚을 먹는 금고 · 2,278자

오프라인 책장
정태수는 10월 2일에 비가 왔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었다. 기억은 선명했지만, 어떤 날이었는지를 정확히 맞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우빈은 기상 자료를 확인하다가 손을 멈췄다. 과거의 강수량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뒷받침할 수는 있어도 여자가 금고를 가져갔다는 사실까지 말해 주지는 못했다. “아버지, 날짜를 틀리게 기억하셔도 괜찮아요.” 태수는 괜히 오래된 달력을 뒤적였다. “내가 가진 게 기억뿐이니 그러지.” “아니요. 장부도 있고, 제작한 상자도 있잖아요. 기억 하나로 싸우자는 게 아닙니다.” 태수는 찬장 위에서 종이상자를 하나 더 내렸다. 손때가 밴 줄자, 부러진 대패날, 누렇게 바랜 식비 봉투가 들어 있었다. 우빈은 왜 그런 물건을 버리지 못했느냐고 물으려다가, 상자 밑에 접혀 있는 작업일보를 보았다. ‘2호 상판 샌딩 보완. 검사 대기.’ 날짜 칸은 젖은 물감에 번져 있었다. 여백에 태수의 필체로 쓰인 메모가 남았다. ‘인계자 확인 전에는 출고 완료라고 쓰지 말 것.’ 태수는 그 문장을 읽고 고개를 떨궜다. “그 말을 지키려 했던 기억은 나.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이미 납품했다고 하더구나. 내 말보다 회사 도장이 더 크니까.” 우빈은 오래전의 아버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막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와 실제로 한 행동은 나란히 기록해야 했다. 둘 중 하나로 다른 하나를 없애 버리면 또 금고와 같은 계산이 된다. 그날 오후 강재가 봉산의 납품 대금 정산표를 찾아왔다. 붉은 외함 두 개에 대한 제작비와 운반비가 10월 8일 한꺼번에 처리돼 있었지만, ‘2호 외함 반출’이라는 줄은 처음부터 대금 항목에서 제외돼 있었다. 현정은 옛 회사의 승인 문서가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 승인서는 10월 5일 자였다. 이틀이나 사흘의 차이가 아니라 순서가 거꾸로였다. 시험을 통과하기 전에 보존용 장치가 나간 셈이었다. “그럼 시제품을 무단 반출한 거네요?” 소라가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아직 반출 권한이 없었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해야 해요.” 현정은 조심스러웠다. 우빈은 그 조심스러움이 답답하지 않았다. 초반에는 누가 ‘거짓말’이라는 한마디만 해 줘도 안심했을 것이다. 이제는 어떤 거짓을 누가 했는지 분리해 기록해야 진짜 피해자가 살아남는다는 걸 알았다. 그때 가방에 넣어 둔 황동 열쇠가 묵직해졌다. 열쇠 머리의 작은 구멍에 푸른 빛이 돌았다. 옆에 있던 검은 금고의 유리 표면에 문장이 번졌다. [2호 외함 / 관리 이탈 이후 10,981일] [무단 반출에 따른 손실: 지급 요청] [납품자 정태수의 공동 부담 가능] “또 아버지네요.” 우빈은 말끝을 삼켰다. 정태수는 상자를 만들었지만 반출 지시를 내렸다는 증거는 없었다. 열쇠가 움직이고 글자가 뜬다고 해서 책임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후 다섯 시, 현정에게 익명의 팩스 한 장이 도착했다. 1996년 생산 관리일지의 복사본이었다. 왼쪽 위 모서리에 날짜 수정 흔적이 있었고, 오른쪽 아래에는 ‘세림’이라는 서명이 흐릿했다. 팩스를 보낸 쪽은 ‘이 서명이 오세림의 책임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소라는 문서를 내려다보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서명 아래 줄이 잘렸어요.” 복사본의 맨 아래에는 글자의 윗부분만 보였다. 강재는 원본 확인 없이는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인쇄기 롤러 흔적을 비교했다. 잘린 글자는 두 글자쯤이 아니라 한 문장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은 문서의 진위를 문의하기 위해 봉산의 자료 보존 담당에게 공식 신청을 넣었다. 답변은 예상 밖이었다. ‘해당 원본은 2010년 전산화 당시 열람 제한 기록으로 분류됨.’ “열람 제한을 누가 요청했죠?” 우빈이 물었다. 강재가 작은 글씨를 읽었다. “수령자. 그런데 이름은 또 백재헌입니다.” 하루 뒤, 오세림에게 연락할 수 있다고 한 퇴직 직원이 다시 전화를 했다. 유종학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거칠었다. “누가 찾아왔어요. 오세림이 자기 책임을 인정한 문서라면서 서명하라더군요.” “서명하셨습니까?” “안 했습니다.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왜 내가 남의 책임을 확정해야 합니까?” 통화를 끝내자 금고에 숫자가 나타났다. [본인 응답 시한: 51:04:16] [불응 시 2호 반출 책임 자동 확정] 우빈은 그 문구를 기록한 뒤 종이를 뒤집었다. 빚을 만들어 내는 금고가 이번에는 어떤 이름을 희생양으로 삼을지 이미 정해 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들에게도 처음으로 남은 시간이 보였다. 그 시간 안에 해야 할 일은 누군가의 서명을 받아오는 것이 아니라, 서명할 수 없는 사람이 왜 침묵하는지를 지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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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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