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직원은 일흔이 넘은 남자였다.
유종학은 봉산의 정문을 지키던 경비원이 아니라, 공장 부속 실험동에서 설비 표찰을 만들던 사람이었다. 그는 박현정이 보낸 문의서에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흘 뒤, 연락 가능한 시간과 장소가 적힌 답장이 도착했다. 작은 도서관의 회의실이었다.
“여러분이 원하는 이름을 말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유종학은 자신의 낡은 수첩을 탁자 위에 놓았다. 책등을 감싼 검정 테이프가 손때에 반질거렸다. “그때 사람 이름을 잘못 적어 큰일이 났거든요.”
우빈은 열쇠부터 꺼내지 않았다. 먼저 자신들이 확인한 사실과 추정을 나누어 설명했다. 정태수가 푸른 외함을 제작한 사실, 10월 2일 반출됐다는 기록, 수취란에 백재헌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 실제로 가져간 사람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까지 말했다.
유종학은 한참 듣다가 수첩의 중간을 펼쳤다.
“백재헌은 사람 이름이기도 했어요. 제0제작소의 시험 책임자. 하지만 그 사람이 직접 상자를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었죠.”
“그럼 그 수취란은 무슨 뜻입니까?” 소라가 물었다.
“당시 서류에는 책임자의 성명을 기본값으로 찍는 관행이 있었어요. 장비가 어디로 가든 우선 백재헌에게 수령됐다고 올라가는 거죠. 나중에 실제 수령인이 확인되면 바꾼다고 했지만, 그 ‘나중’이 오지 않았습니다.”
유종학의 설명은 기록을 모두 깨끗하게 만들어 주지 않았다. 부당한 관행이 있었다는 증언이지 모든 서류가 자동으로 조작됐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현정은 그 차이를 확인하며 당시 표찰 발주서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노인은 왜 이제야 기록을 꺼내는지 먼저 설명했다. 이전에도 회사 관계자라는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특정인의 서명만 확인해 달라고 했다. 공장 폐쇄 뒤 직원들이 받은 실제 퇴직금과 미지급 임금을 찾아 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내 친구 조성문은 그때 다친 손 때문에 다시 일을 못 했어요. 산재 서류에는 장비 시험이 없었다고 적혀 있더군요. 그걸 고쳐 달랬더니 먼저 누가 상자를 받았는지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유종학은 종이컵을 천천히 밀었다. 손끝이 떨리자 물이 조금 넘쳤다.
“사람들이 종이 하나를 무서워하는 건 종이가 무서워서가 아니에요. 그 뒤에서 누가 또 자기 말을 바꿀지 몰라서죠.”
소라는 그 말 앞에서 평소처럼 빠르게 질문하지 않았다. 피해 기록이 있는 곳마다 비슷한 두려움이 있었다. 우빈도 잠시 펜을 내려놓았다. 노인이 들려준 조성문의 이야기를 푸른 금고의 증거로 삼기 전에, 본인이 무엇을 공개하길 원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노인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얇은 먹지 위에 같은 번호가 두 번 찍혀 있었다.
[수령자 기본값: BJH]
[실물 인계 대상: 공란]
“푸른 상자를 들고 나간 여자는 알고 계세요?” 우빈이 물었다.
“그날 우산을 쓰고 들어온 직원이 있었다는 건 기억해요. 이름은 오세림. 출하 검사 담당이었죠. 다만 제가 본 건 그 사람이 빈 손으로 들어간 모습뿐이었습니다. 나올 때는 반대편 문을 썼는지 못 봤어요.”
소라가 적어 둔 이름을 천천히 읽었다.
“오세림.”
“그 여자가 실험에 반대했어요. 물건을 보관한다는 게 왜 사람의 책임까지 가져간다는 뜻이 되느냐고.”
유종학은 다른 종이를 보여 주었다. 당시 시험 항목에는 ‘보류권 보장’, ‘확인 전 확정 금지’라고 적혀 있었다. 그 밑에 수정된 붉은 글씨가 덧씌워져 있었다.
‘보류 상태 장기화 시 관리자 책임 자동 승계.’
“누가 고쳤습니까?”
“그걸 몰라서 삼십 년째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회의가 끝날 무렵, 노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세림 씨가 살아 있다면, 그 사람에게 주소를 묻기 전에 왜 숨었는지부터 생각해 주세요. 이름 하나로 이미 많이 당했으니까.”
밖으로 나오자 맑던 하늘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라는 봉투를 파일에 넣었다. 우빈은 자신이 이제 막 이름을 하나 알아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삶을 또 추적 대상처럼 취급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금고의 표시창에는 새로운 글자가 떴다.
[생존자 후보 식별: 오세림]
[본인 응답 없음 / 대리 응답 접수 준비]
“안 돼요.” 우빈이 즉시 말했다.
[대리 응답 후보: 정우빈]
그는 화면을 끄기 전에 답변을 녹화했다.
“오세림 씨가 응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대로 남기겠습니다. 그걸 제 응답으로 바꾸지 마세요.”
금고는 잠시 조용했다. 그러다 한 줄이 더 나타났다.
[대리 응답 거절 접수]
[본인 응답 시한: 72시간]
누군가의 침묵을 견디는 데에도 기한을 매기는 장치였다.
제17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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