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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71화
PAYLUA ORIGINAL · 제171화

171화. 발송지가 사라진 상자

빚을 먹는 금고 · 2,345자

오프라인 책장
황동 열쇠는 따뜻해지지 않았다. 정우빈이 손바닥에 올려 둔 지 십 분이 지났지만, 금속은 마치 냉장고에서 막 꺼낸 것처럼 차가웠다. 식탁 건너편의 정태수는 아들이 가져온 1996년 출하 목록을 두 번 읽고서 안경을 벗었다. “봉산 제0제작소. 그 이름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우빈은 종이에 표시한 날짜를 가리켰다. 붉은 외함은 10월 8일에 정식 납품됐지만, 푸른 외함은 그보다 엿새 앞선 10월 2일에 반출됐다고 적혀 있었다. 태수의 공방 장부에는 푸른 외함의 납품 서명이 없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여자가 가져간 날이 2일이에요?” “아마 그럴 거다. 비가 왔어. 여자가 상자를 덮을 방수포를 가져왔거든.” “그런데 수취인은 백재헌으로 돼 있어요.” “내 앞에 있던 건 여자였어. 적어도 내가 얼굴을 보고 넘긴 사람은.” 두 사람이 잠시 말을 잃은 사이, 이명숙이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냈다. 명숙은 열쇠를 쳐다보지 않았다. 도마 위에 반으로 잘라 둔 배를 접시에 담으며 말했다. “누가 가져갔느냐와 누가 받았다고 적었느냐가 다른 거겠지.” 금고를 만난 뒤로 우빈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렇게 평범하게 말하자, 그 차이가 처음으로 생활 속의 문제처럼 들렸다. 택배 한 상자만 잘못 배달돼도 실제 받은 사람을 찾아야 한다. 서류에 이름이 있다는 이유로 낯선 사람에게 짐값을 청구해서는 안 된다. 다음 날 중앙기록관리원에서 박현정은 봉산 관련 등기와 사업장 이력 자료를 펼쳤다. 제0제작소는 오래전 폐쇄됐지만, 같은 지번에는 지금도 소형 기계 부품 공장이 운영되고 있었다. 명칭은 세 번 바뀌었고, 도로명 주소도 달라졌다. “지도에 제0제작소라는 이름은 안 나옵니다. 사유지이니 무작정 들어가면 안 돼요.” “옛날 배치도를 구할 수 있을까요?” 서강재가 낡은 소방 점검 목록을 가져왔다. 목록에는 지금 건물과 겹치는 회색 직사각형 하나가 있었다. 옆에 연필로 적힌 문구가 보였다. ‘0동. 제품을 만들지 않는 장소.’ 김소라가 팔짱을 끼었다. “제작소인데 제품을 만들지 않았다고요?” “시험에서 실패한 물건을 보관한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강재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추정이에요.” 우빈은 도면을 확대하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출입구 앞에는 차량 회전 공간이 없었다. 물건을 반출했다면 다른 건물의 통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파란 색연필로 표시된 가는 선이 도면 가장자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공장 대표와의 통화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그는 매일 부품 납기를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예전 회사 이야기가 나오자 처음에는 사기 전화가 아닌지 의심했다. 우빈이 사건 자료를 설명하자 대표는 한숨을 쉬었다. “저희는 그때 회사가 아닙니다. 같은 땅이라고 같은 책임까지 사 온 건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지금 공장에 채무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건 아니에요. 옛 설비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겁니다.” “그 말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폐쇄동 때문에 경고문이 날아와요. 반출하지도 않은 장치를 돌려 달라는 내용입니다. 직원들이 무서워합니다.” 우빈은 전화를 끊고 공장 현장 사진을 보았다. 점심시간이면 노동자들이 같은 식탁에서 도시락을 먹는 곳이었다. 푸른 금고를 찾겠다고 이들의 일터까지 위협해서는 안 됐다. 그는 방문 승인 요청서 맨 위에 한 문장을 추가했다. ‘현 운영 사업자의 책임 인정이나 채무 인수 요청이 아님.’ 그때 우빈의 금고 화면에 문장이 나타났다. [2호 보존 장치 / 수취인 생존 확인 필요] [대체 수취인 지정 가능: 정우빈] “또 제 이름을 넣으래요.” 그는 화면을 보여 주되 버튼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소라는 첫 금고를 발견했을 때의 우빈을 떠올렸다. 가족에게 닥친 빚을 혼자 해결하겠다며 밤중에 수상한 계약을 넣었던 사람. 지금은 대체 수취인이 되라는 문장을 읽고도 먼저 얼굴을 찌푸렸다. “살아 있는 사람을 확인하라더니, 확인하기 전에 다른 사람부터 적으라는군요.” “장치가 주장하는 생존과 실제 생존도 구별해야죠.” 현정이 말했다. 그들은 부품 공장의 대표에게 옛 배치도를 조사할 수 있는지 정식으로 문의했다. 대표는 보안 시설에는 접근할 수 없지만, 옛 근로자 명부 일부를 보관한 퇴직 직원과 연락을 연결해 주겠다고 답했다. 저녁, 우빈의 전화에 짧은 음성 메시지가 왔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기계적인 음성이었다. ‘푸른 상자는 열지 않아도 일을 합니다. 누군가 받지 않았다고 말할 때마다요.’ 이어 수화기 너머에서 철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2호 외함 / 마지막 보존 신호: 오늘 17:42] [위치: 봉산 제0제작소가 아닌 곳] 금고는 그들에게 주소를 알려 주지 않았다. 대신 이제까지 추적하던 발송지가, 이미 목적지가 아니라는 사실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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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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