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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70화
PAYLUA ORIGINAL · 제170화

170화. 가족은 채권이 아니다

빚을 먹는 금고 · 2,864자

오프라인 책장
철문 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났다. 정우빈은 그 냄새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물에 적신 사포로 나무 표면을 다듬을 때 나던 냄새였다. 지하 사무실의 타일은 천천히 흐려지고, 그 아래에 1996년 작업장의 회색 시멘트 바닥이 겹쳐졌다. 금고는 또다시 과거를 재현하고 있었다. 우빈은 눈앞에 보이는 장면을 사실로 단정하지 않으려 손등을 움켜쥐었다. 작업대 위에 상자 두 개가 있었다. 붉은 줄, 푸른 줄. 붉은 상자 앞에는 ‘자동 정산’ 도장이, 푸른 상자 앞에는 ‘수령 보류’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젊은 태수가 나무 끝을 다듬는 모습도 보였다. 곁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자가 서 있었다. ‘당신은 둘 중 어떤 장치를 맡으시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검은 양복의 남자가 물었다. 현재의 검은 양복 남자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1996년의 실제 영상이라면 그의 나이가 맞지 않았다. 우빈은 곧장 소라를 돌아봤다. “이 장면은 원본 녹화가 아니에요. 우리 기억을 끌어다 만든 것 같아요.” ‘선택하지 않으면 열두 가구의 부담을 당신 아버지에게 돌리겠습니다.’ 금고가 말하는 동안 천장에서는 영수증이 쏟아졌다. 우빈은 한 장을 펼쳤다. ‘가족 보호금 80만 원 수령 확인.’ 아버지의 서명이 또렷했다. 그러나 그 서명은 나무 외함 납품 계약서에서 잘라 붙인 듯 같은 기울기와 점 하나까지 일치했다. “이건 똑같은 서명을 다른 명목에 붙였군요.” 현정이 인쇄된 거래 식별번호를 비교했다. 과거 실험의 영수증과 태수목공의 납품 잔금은 동일한 번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건물 주민이 서명했다는 확인서는 2010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원본을 소급하여 수정한 시간이 별도로 남아 있었다. “대금 거래는 실재했습니다.” 강재가 말했다. “하지만 보호금 지급이나 승계 동의는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철문 밖에서 황복자가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도 받았다고 적지 마요. 한 푼도 받은 게 없으니까.” 복도 곳곳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낯선 사람들이 금고 앞까지 내려온 건 아니었다. 관리실에서 녹음 여부에 동의한 주민들의 진술을 직원이 재생하고 있었다. 누군가 대신 만들어 낸 한 문장보다, 각자가 다른 말투로 남긴 사실이 더 정확했다. 검은 양복의 남자가 붉은 상자 앞에 손을 얹었다. ‘동의가 없어도 지급됐다고 확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적을 수는 있겠죠.” 우빈이 대답했다. “하지만 없던 지급을 만들 수는 없어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 붉은 상자 틈에서 검은 종이 뱀이 기어 나왔다. 비늘 하나하나에는 가족의 이름 대신 ‘미발생 손실’, ‘예상 보호료’, ‘장기 승계’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뱀은 태수의 그림자부터 물어뜯으려 했다. 우빈은 아버지를 앞으로 밀어 내지 않았다. 사람을 지키겠다고 거짓 인계를 승인하는 순간, 금고는 다시 승리할 것이었다. 대신 소라가 주민 동의 범위를 명시한 진술 목록을 제출했고, 현정이 1996년 기록과 2010년 덧씌운 양식을 나누어 놓았다. 강재는 돈이 실제로 어디에서 나왔는지 연결되는 전표를 화면에 띄웠다. [거래 A / 외함 제작 잔금 800,000원 / 납품 확인] [거래 B / 보호금 지급 800,000원 / 지급 증빙 없음] [거래 식별번호 중복] 종이 뱀이 우빈의 발목을 감쌌다. 오래전 도영식의 지하실에서 처음 겪었던 무게와 똑같았다. 우빈은 힘으로 떼어 내지 않았다. 화면의 마지막 질문을 똑바로 보았다. [최종 확인: H-001 가족이 보호금을 수령하였는가?] “아니요. 가족을 시험용으로 만들어 놓고, 그 이름에 사람들을 나중에 끼워 넣었습니다.” 태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받은 건 나무를 만든 값이오. 그날의 일에 책임이 있다면 한 일만큼 설명하겠소. 하지만 내 아내와 아들을 저 서류의 부품으로 쓰지는 못해.” 뱀의 몸통이 여러 갈래로 끊어졌다. 지하실 벽에 붙어 있던 이름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대신 본래 주소와 독립된 세대번호로 돌아갔다. 소라의 휴대전화에 정상적인 정산 중지 통지가 떴다. [H-001 / 2010년 사후 가족 연결: 검증 불가] [연화빌라 세대 12가구 / 자동 채무 이전 정지] [1996년 납품 대금 / 별도 실제 거래로 유지] [보호금 가상 수령 기록 / 독립 조사 의뢰] 이번에도 모든 것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실제 주거 피해와 세대 정보 도용에 대한 조사, 가짜 보상금을 미끼로 접근한 사람들의 책임을 가려야 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일단 자기 이름으로 된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태수는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우빈은 아버지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부모가 남기는 것이 언제나 돈이나 빚만은 아니었다. 오늘 태수는 자신이 정당하게 만든 물건을 설명했고, 거짓 계약에 자신의 가족을 넘기지 않았다. 그것도 분명 자식에게 남길 수 있는 것이었다. 저녁 무렵 우빈은 현정과 함께 1996년 실험 기록의 이관 목록을 다시 확인했다. 사건 기록이 분리되면서 그동안 ‘보호금’에 가려졌던 발송지가 드러났다. ‘발신: 봉산 제0제작소.’ 그리고 붉은 외함과 푸른 외함의 최초 출하 일자는 서로 달랐다. 푸른 상자는 시험 승인도 받기 전에 먼저 외부로 반출됐다. 그 아래 수취란에 낯익은 이름이 찍혀 있었다. ‘백재헌.’ 우빈이 소라에게 화면을 돌려 보여 준 순간, 황동 열쇠가 탁자에서 한 번 흔들렸다. 신발장 아래에서 아버지가 찾아 준 그 열쇠였다. 열쇠 머리에는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글자가 떠 있었다. [봉산 제0제작소 / 2호 보존 장치 개봉 키] [수취인: 살아 있는 사람] 우빈은 작은 열쇠를 움켜쥐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것이 누군가의 생명이나 진실이라면, 먼저 그 사람을 찾는 일이 필요했다. 열쇠를 빛 아래에 올려놓았을 때, 휴대전화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푸른 상자는 아직 닫혀 있습니다. 백재헌은 그것이 열리기를 가장 두려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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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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