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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69화
PAYLUA ORIGINAL · 제169화

169화. 열두 가구의 증언

빚을 먹는 금고 · 2,439자

오프라인 책장
금고가 정한 심사 마감 여덟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줄었다. 우빈이 연화빌라에 돌아왔을 때 복도에는 낯선 종이가 나뒹굴었다. 검은 손은 보이지 않았지만 문틈마다 '보호금 지급 완료' 도장이 찍힌 안내문이 꽂혀 있었다. 황복자가 주민들을 1층 현관에 모아 두었다. 평소라면 반상회조차 잘 열리지 않는 건물이었다. “부디 알아서 하라는 말은 안 할게요. 오늘은 우리 사는 집 문제예요.” 황복자는 장부를 펼쳐 보였다. 입주 연도가 가구마다 달랐고, 1996년에 거주했다는 주민은 한 명도 없었다. 집주인이 바뀐 세대도 여러 곳이었다. 누군가는 청소비를 밀렸고, 누군가는 월세를 두 달 늦게 냈지만, 누구도 1996년 실험과는 상관없었다. 우빈은 사람들 앞에서 금고가 보여 준 자료를 설명했다. 그가 무엇을 확정해서 말할 수 있고 무엇을 조사 중인지도 구분했다. 1996년의 시험 장소는 지하였고, H-001 코드는 2010년에 덧붙여졌다. 어젯밤 보상금은 지급된 증거가 없었다. 정전이 실제로 일어났고 복구된 것은 확인됐다. “근데 우리 개인정보가 왜 저런 데 있죠?” 한 주민이 물었다. “그 문제는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열람 범위를 좁혀서 신고하겠습니다.” 현정이 답했다. “그럼 우리가 여기 서 있으면 동의가 되는 거예요?” 우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금고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뿐이에요. 다만 그 주장을 깨려면 각자 겪은 사실을 기록해야 해요. 원하지 않으시면 성함은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복자는 가장 먼저 자신의 진술서를 썼다. 정전 당시 휴대전화로 연락받은 내용, 대리 수령을 거부한 시간, 받은 돈이 없다는 사실. 다음으로 두 가구가 따라 썼다. 아기를 안고 있던 여자는 자신의 진술이 아이 이름과 연결되지 않도록 요청했고, 현정은 해당 정보가 불필요하다고 확인했다. 그들이 적는 동안 금고의 그림자가 복도 천장에 번졌다. 벽에 붙은 오래된 가족사진마다 사진 속 얼굴 옆으로 작은 숫자가 나타났다. 1996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와 최근 이사 온 노인의 얼굴이 같은 가족관계 코드로 묶였다. ‘모두 한 가족입니다.’ 종이가 속삭였다. 황복자는 벽을 가리켰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서로 도와주고 사는 건 맞아. 그렇다고 남이 한 계약까지 떠안는 건 아니지.” 그 말에 주민들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라는 문 앞에 놓인 안내문을 떼지 않고 종이의 발행 일자를 기록했다. 강재는 H-001이라는 실험용 코드가 실제 주민등록 세대 정보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대조표를 만들었다. 그사이 주민들 사이에서도 다툼이 있었다. 한 청년은 모두가 실명으로 진술해야 힘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혼자 사는 노인은 주소가 널리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불안하다며 이름을 빼 달라고 했다. 황복자는 둘 사이에 서서 의견을 물었다. “서로 안 위험하게 도와주려면 방법이 있어야죠.” 현정은 진술서의 원본을 기관에 안전하게 제출하고 공개용 자료에서는 불필요한 식별 정보를 가리자고 제안했다. 청년은 처음엔 답답해했지만, 노인이 자꾸 손을 주무르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에 놓인 의자에는 빵 봉투가 하나 올라왔다. 장기 출장 중인 마지막 가구에 연락이 닿지 않아도, 그 가족의 권리를 누군가 대신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황복자가 평소 쓰던 관리 공지망에 ‘임의 서명이나 금전 수령 없이 공식 확인을 기다리겠다’는 안내를 올렸다. “전 이런 회의 싫어해요.” 황복자가 말했다. “맨날 누가 돈을 안 냈네, 불을 안 껐네 싸움만 나니까. 그런데 오늘은 누가 늦게 답한다고 그 사람 자리 뺏으면 안 되겠네요.” 우빈은 입주자 명단 맨 마지막 빈칸을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이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책임지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칸을 빈 채로 지켜 두는 것이 누군가를 위한 유일한 방법일 수 있었다. 마감 한 시간이 남았을 때 열한 가구의 진술이 모였다. 마지막 세대는 장기 출장 중이라 직접 연락하기 어려웠다. 우빈이 무턱대고 대리 서명할 수 없다고 말하자 시스템에는 새로운 문구가 떴다. [동의 확인 부족: 1세대] [일괄 보호금 정산 진행 가능] “저것 때문에 한 사람을 불러내야 하나요?” 소라가 물었다. “아니요. 우리가 모은 건 열한 가구의 사실이에요. 마지막 한 집이 없다고 다른 사람들 말까지 없던 게 되지는 않아요.” 우빈은 개별 진술과 정전 복구 자료, 1996년 도면을 각각 다른 항목으로 제출했다. 화면이 거칠게 흔들렸다. 비어 있는 마지막 한 칸에서 이름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대리 동의 후보: 정우빈] 우빈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 금고를 만났던 밤과 같은 유혹이었다. 자신 하나만 적으면 모두 안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장치. 하지만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제 이름도 쓰지 않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대답을 강요하지도 않겠습니다.” 복도 끝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방이 아니라, 지하로 내려가는 오래된 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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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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