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장을 분해하지 않겠다는 결정에 정태수는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가 오래 쓰던 거다. 무엇이 들었다고 함부로 뜯을 것 없어.”
우빈은 표면 사진을 찍고, 현정에게 1996년 도면과 비교할 수 있는지 물었다. 복원 전문가는 앞판의 나뭇결과 경첩 위치를 대조했다. 같은 규격으로 제작됐다는 가능성은 높았지만, 이 서랍이 바로 미납품 외함의 부품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이 뜻밖에 위로가 됐다. 이 집의 물건은 모두 무슨 비밀의 증거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평범하게 쓰이고 낡을 권리가 있었다.
도면에는 두 장치가 서로 반대의 작동 방식을 갖는다고 적혀 있었다. 1호는 신청이 확인되지 않아도 수령을 ‘완료’로 바꾸는 시연용 장치였다. 2호는 당사자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기록을 ‘보류’로 남기는 장치였다. 이름도 달랐다.
[1호: 자동 정산]
[2호: 수령 보류]
“이게 원본 보존 명령의 선조일 수 있겠군요.” 현정이 말했다.
“누가 만들었죠?”
“설계자 칸이 가려져 있어요. 하지만 시험 책임자는 있어요. 백재헌.”
그 이름이 나오자 소라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껏 백재헌은 회수 계정과 허위 채권 거래망의 그림자로 나타났다. 그는 1998년 사태 이후에 끼어든 관리자가 아니라, 최초 시제품 단계부터 관여했던 사람이었다.
우빈은 복원 전문가가 보여 준 접합부 사진을 오래 보았다. 2호 외함의 바닥에는 아주 얕은 홈이 두 개 있었다. 목재가 팽창하더라도 안에 둔 종이를 찢지 않고 꺼낼 수 있게 만든 공간이었다. 아버지는 기술적인 질문을 받자 오랜만에 손으로 도면을 가리키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종이가 끼면 사람 손으로 꺼내야 하잖아. 그래서 틈을 뒀어.”
“그걸 누가 주문했어요?”
“작업 지시서에는 없었어. 내가 덧붙였지. 이 안에 뭘 넣든 안 찢어지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태수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우빈은 아버지가 자기가 만든 것에 관해서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기억이 흐릿한 영역과 손끝에 남은 기술은 달랐다.
박현정은 옛 기술 표준 문서를 읽다가 흥미로운 기록을 찾았다. 1996년의 시험 지침에는 ‘거부 의사 확인 불가 시 지급 미확정 처리’라는 원칙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같은 달에 작성된 자동 정산 시험 보고서는 이 원칙을 정반대로 해석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받았다고 처리한다는 것이다.
“원칙을 어긴 시험을 성공이라고 보고한 거예요?” 우빈이 물었다.
“보고서만 보면 그렇습니다. 정작 검증 담당자의 결재는 비어 있어요.”
소라가 출력물을 나란히 놓았다. 하나는 투명한 보관이 무엇인지 설명했고, 다른 하나는 기록의 빈칸을 수익으로 바꾸는 방법을 설명했다. 같은 회사 문서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달랐다.
“그럼 2호 장치는 원래 잘못된 확정을 막으려고 만든 거네요.”
“그렇게 설계됐다고 보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작동했는지는 확인해야 하지만요.”
우빈은 아버지가 만들어 둔 서랍의 작은 틈을 손가락 끝으로 훑었다. 사용자가 열쇠를 잃어도 사람이 종이를 빼낼 수 있게 만든 간격. 복잡한 마법의 금고와 달리, 사람 손이 들어갈 자리를 남겨 둔 기술이었다.
명숙은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그것도 좋은 기술이네. 못 열게 만드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열 수 있게 만드는 거잖아.”
그 말을 들은 우빈은 잠시 웃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찾은 금고는 대부분 문을 닫고 책임을 떠넘겼다. 그러나 어쩌면 처음부터 다른 문을 만들려 했던 사람도 있었을지 몰랐다.
그때 동림 계승관리에서 서류 한 장이 도착했다.
‘미납품 2호 외함의 소유권 인도 요구.’
“처음엔 보호금이라더니 이제 서랍까지 가져가겠대요?” 명숙이 물었다.
서류에는 소유권이 회사에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물품 인도증은 없었다. 현정은 우빈에게 당장 응답하지 말고, 현재 소유자가 누구인지 실제 계약 관계부터 확인하자고 했다.
그날 밤 우빈은 작은 서랍 안에서 낡은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태수가 공방에서 찍은 단체사진이었다. 사진 뒤쪽에 나무 상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붉은 줄이, 다른 쪽에는 푸른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런데 사진 뒷면에 아버지가 적은 날짜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푸른 상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빈이 아버지를 바라보자 태수는 처음으로 정확한 답을 했다.
“2호는 미납품한 게 아니야. 누가 먼저 가져갔어. 나는 그걸 납품으로 처리하지 않았지.”
보류를 위한 두 번째 금고는 처음부터 기록 밖으로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제16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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