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는 오래된 서류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정리해 둔 것도 아니었다. 철물점 영수증과 병원 진료비 봉투, 아들이 초등학교 때 쓰던 학습장까지 같은 상자에 담겨 있었다. 우빈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침대 옆 장롱 아래에서 먼지 묻은 상자를 꺼냈다.
“나는 돈을 받은 걸 숨길 생각이 없다.”
“알아요.”
“그래도 그 돈 때문에 네가…”
태수가 말을 잇지 못했다. 우빈은 서류를 꺼내려는 아버지 손을 잠시 붙잡았다.
“받을 돈을 받은 게 왜 죄예요. 아버지한테 돈을 줬다고 주장하는 쪽이 무슨 명목으로 줬는지 증명해야죠.”
상자 가장 밑에는 1996년 납품 계약서의 먹지 사본이 있었다. 기재된 품목은 목재 외함 두 개, 내부 완충재, 경첩 받침대 네 개. 납품 장소가 연화동 지하로 적혀 있었고, 분할 결제된 총액 옆에 태수의 서명이 있었다. 잔금은 정확히 팔십만 원이었다.
“두 개요?”
우빈이 동그라미를 그렸다.
“우리가 봤던 금고는 하나잖아요.”
“한 개는 납품하지 않았어. 설계가 바뀌었다고 해서 작업장에 보관했지. 나중에 찾으러 온 사람이 없어서 부품을 떼어 썼다.”
“부품을 어디에 썼는데요?”
태수는 현관 쪽을 가리켰다. 오래된 신발장 아래 서랍이었다. 다리가 부러졌을 때 아버지가 새로 만들어 준 작은 서랍. 우빈은 어린 시절 동전을 숨겨 두었던 기억이 났다.
두 사람은 아무것도 뜯지 않고 신발장을 들어 올려 아래쪽을 살폈다. 나무 밑면에는 연필로 쓴 수치와 작업장 도장이 남아 있었다.
‘TAESU / 96-02.’
명숙이 다가와 물었다.
“이거 때문에 우리 집으로 금고가 왔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럴 수도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에요.”
우빈이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도 오래된 나무 한 조각을 또 다른 운명의 증거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날 오후 현정은 독립적인 회계 전문가에게 계약서와 세금 신고 자료를 대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목재가 실제 납품된 사실은 당대 운송 내역으로도 확인됐다. 하지만 금고가 제시하는 보호금 지급 기록에는 동일한 금액이 다른 계정에서 출금된 것으로 처리돼 있었다. 실물 돈이 두 번 움직인 흔적은 없었다.
“같은 돈의 이름을 두 번 쓴 거예요.” 강재가 말했다.
“어떻게요?”
“일단 임금으로 지급한 다음, 장부의 복사본에서는 보험금으로 다시 기재한 겁니다. 두 계정이 같은 결제 식별번호를 쓰고 있어요.”
우빈은 점심때 병원 앞에서 아버지와 잠깐 걸었다. 태수는 오래 걸으면 숨이 찼지만, 이상하게도 손으로 나무를 다듬던 이야기를 할 때는 몸을 구부리지 않았다. 그는 1996년 공방의 월급 봉투가 항상 금요일에 나갔다고 했다. 직원들 임금을 밀리지 않으려 납품 대금을 재촉했던 것도 기억했다.
“잔금을 받지 못했으면 우리 공방 직원들한테 그달 급여를 못 줬을 거다.”
“그럼 그 돈을 받은 건 다른 사람들 임금을 지킨 일이었네요.”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까지 할 건 없다. 해야 할 일을 한 거지.”
태수는 벤치에 앉아 오래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손등에는 작은 화상 흉터가 있었다. 금고 안쪽 경첩을 맞추다 다친 자리라고 했다. 우빈이 처음 금고를 만졌던 밤을 기억하는 것처럼 아버지도 어떤 금속의 냉기를 몸에 남겨 두고 있었다.
“내가 그 상자만 만들지 않았다면 너희한테 이런 일이 없었을까.”
“누군가 만든 물건을 잘못 쓴 사람의 책임까지 만든 사람에게 넘길 순 없죠.”
우빈은 한 번 더 생각하고 덧붙였다. “아버지가 아는 잘못이 있다면 따로 확인하면 돼요. 없는 잘못까지 덮어쓸 필요는 없어요.”
아버지는 아들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두 사람 모두 돈 이야기를 하러 나왔지만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이야기가 됐다.
금고의 스피커에서 마른 웃음소리가 났다.
‘대금 명칭이 달라도 받은 사실은 남습니다.’
“그래서 받은 용도를 확인하는 겁니다.” 우빈은 답했다.
‘가족 보호를 거부하면 납품 대금 회수가 진행됩니다.’
“납품은 끝났고 대금은 지급됐어요. 뒤늦게 마음대로 빚으로 바꿀 수 없어요.”
스피커가 잠잠해졌다. 대신 금고 전면에 납품 부품의 도면이 떠올랐다. 오른쪽 하단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2호 외함 / 보호 기록 보관 전용]
[1호 외함 / 수령 자동 확정 전용]
우빈은 아버지가 쓰다 남긴 신발장을 바라봤다. 금고가 왜 두 개의 외함을 주문했는지, 이제 그 질문에 답할 실물 조각이 집 안에 있었다.
제16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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