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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64화
PAYLUA ORIGINAL · 제164화

164화. 주인이 없는 보호금

빚을 먹는 금고 · 2,333자

오프라인 책장
그날 밤 연화빌라 전체에 정전이 났다. 처음엔 단순한 차단기 고장으로 보였다. 복도의 센서등이 꺼지고 옥상 물탱크 펌프가 멈췄다. 주민들은 휴대전화 불빛을 들고 계단으로 나왔다. 우빈은 전기 배전함 앞에서 작업복 차림의 수리 기사를 만났다. 기사는 계약된 시설 관리업체 직원이었고, 황복자가 직접 불러 둔 사람이었다. “이상합니다. 차단기가 내려간 게 아니라 계량기 화면만 꺼졌어요.” 기사는 배전함을 열지 않은 채 먼저 외부 공급 상황부터 확인했다. 인근 건물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 순간 우빈의 휴대전화에 검은 창이 떴다. [보호금 환급 신청 가능] [정전 피해 보상 / 세대당 500만 원] [수령 동의 시 1996년 가족 H-001 자동 편입] 복도 끝에서 누군가 환호했다. 네 사람의 휴대전화에도 같은 알림이 떠 있었다. 정전 때문에 냉장고가 꺼진 주민에게 오백만 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이거 받으면 전기 고쳐 준대요?” 젊은 남자가 물었다. “계량기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황복자가 말했다. “저런 문자는 관리실에서 보낸 게 아니에요.” 그때 지하 계단에서 작은 검은 손이 나왔다. 전기선처럼 꼬인 손가락 끝에는 영수증이 매달려 있었다. 손은 주민들에게 휴대전화를 내밀며 속삭였다. ‘받기만 하면 됩니다. 서명도 필요 없습니다.’ 아이를 안고 서 있던 주민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우빈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자신이 첫 번째 금고 앞에서 했던 선택을 다른 사람에게 권할 수는 없었다. “이건 보상 신청이 아닙니다. 가족으로 묶이게 하는 동의예요.” 우빈이 외치자 종이 손이 길어졌다. 형광등 없는 천장 위로 그림자가 번지며 계단의 유리창을 차례로 덮었다. 창마다 주민의 이름이 새겨졌다. [보호대상 후보 12가구] [미동의 가구 보호 예외 처리] [기한 00:17:58] 소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동의하지 않으면 보상을 못 받는다는 것도 거짓말이에요. 실제 손해가 있으면 별도로 조사해야 해요. 지금 뜬 건 보험사의 정식 접수도 아닙니다.” “그럼 전기 안 켜지면 어떡해요?” “그건 시설업체가 고칩니다. 저 문자를 눌러야 고쳐지는 게 아니에요.” 수리 기사는 관리인의 안내에 따라 외부 공급사의 비상 번호로 신고했고, 당직 직원과 통화 후 계량기 신호 장애를 확인했다. 금고의 그림자가 차단기함으로 손을 뻗자 우빈은 플라스틱 배전함을 닫고 사람들을 위층으로 안내했다. 위험한 기계를 부수는 대신 사람을 먼저 이동시켰다. 잠시 후 위층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에게 안긴 아이는 어두워진 현관을 무서워했다. 젊은 여자는 문자 화면을 보여 주며 물었다. “수령을 안 한다고 하면 우리 애가 피해자가 되는 거예요?” 우빈은 곧바로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도 금고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알지 못했다. 그는 거짓 안심 대신 분명한 사실을 말했다. “지금 신청서에는 아이 이름이 없고, 지급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더 중요한 건 누구도 아이의 삶을 대신 담보로 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명숙이 계단 중간에서 아이를 달랬다. 어머니는 금고 이야기를 누구보다 오래 들은 사람이었다. 손이 떨리는 것까지 우빈에게 보였지만 주민 앞에서 두려움을 감추려 애쓰지 않았다. “무섭지. 나도 무서워요. 그래도 겁이 나서 낯선 종이에 손을 대면 더 무서울 거예요.” 그때 종이 손이 천장을 긁었다. 분진과 함께 떨어진 검은 가루가 아이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황복자가 우비를 펼쳐 아이를 가렸다. 평범한 비닐 우비였다. 마법을 막을 재료는 아니었지만 그 사이 우빈이 사람들을 계단 밖으로 이동시킬 시간은 생겼다. 서로 잘 알지도 못하던 주민들이 휴대전화 조명을 비추며 길을 만들었다. 금고가 그들을 한 가족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 누군가를 돕기로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 정전이 해소됐다. 실제 원인은 건물 인입 배선의 오래된 접속부 불량이었다. 업체는 고장 기록과 복구 시각을 남겼다. 검은 손도 사라졌다. 하지만 주민들의 휴대전화에는 수령 완료 표시가 아직 남아 있었다. “누르지도 않았는데 왜 완료라고 뜨죠?” 황복자가 물었다. 현정에게 사진을 보낸 우빈도 화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보호금 수령 상태: 묵시적 승낙] [증거: 현장 체류 17분] 어떤 사람도 신청한 적이 없는데, 정전된 복도에 머무른 시간이 동의로 계산됐다. 우빈은 휴대전화 화면을 밝히고 주민들을 돌아봤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모아야 할 증거는 있어요. 여기 계셨다는 사실이 아니라, 누구도 받겠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요.” 복도에서 아기를 안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어 알림의 원본과 수신 시간을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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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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