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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63화
PAYLUA ORIGINAL · 제163화

163화. 환영합니다, 새로운 가족

빚을 먹는 금고 · 2,393자

오프라인 책장
어머니는 자기 이름이 적힌 명부보다 타인의 이름이 지워진 명부를 더 오래 보았다. 1996년 지하 시험실의 임차 기록을 확인한 다음 날, 우빈은 당시 ‘보호 시연회’ 참가자 명단을 받았다. 모두 여덟 칸이었다. 둘째 칸에는 입주자 이름 대신 ‘계측 담당’이, 다섯째 칸에는 정태수의 작업장 사업자 번호가 적혀 있었다. 마지막 칸은 지워져 있었다. “이명숙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네요.” 현정이 말했다. “그런데 가족관계 코드는 우리 집으로 바뀌었죠.” 소라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처음에는 ‘가족’이 누군지를 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명숙이 기억한 것은 우산이었다. 납품 대금을 받으러 갔던 태수를 따라 지하 계단까지 내려간 날, 바깥에는 비가 왔다. 서류를 내미는 남자는 연노란 비닐 우산을 접지 않고 들고 있었고, 우산 끝에서 떨어진 물 때문에 바닥이 질척거렸다. “그 사람이 이랬어. 물건을 맡겨 두면 누군가의 집을 지켜 준다고.” “무슨 뜻이었어요?” “나도 물었지. 그랬더니 사고가 나기 전에 손실을 처리하는 장치래. 보험하고 비슷하다고.” 명숙은 웃지도 않았다. “그때 내가 물었어. 아직 사고가 나지도 않았는데 누가 돈을 받아 가느냐고. 그 사람은 대답을 안 했어.” 태수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받은 일은 일정한 치수의 나무 케이스와 받침대를 제작하는 작업이었다. 뚜껑을 달아 달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내용물을 본 적은 없다고 했다. 계약서는 납품 확인서가 전부였고, 가족관계 정보는 제공한 기억이 없었다. “돈은 받았어. 두 번에 나눠서. 제대로 일한 값이었지.” 우빈은 그 한마디에서 아버지의 떨림을 알아들었다. 30년 전의 정당한 노동 대가마저 지금의 채무로 부정당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받은 임금은 빚이 아니에요.” “알아. 그런데 저 사람들은 그 차이를 모르겠다고 나오니까.” 가족이 함께 적은 진술은 짧았다. 태수는 장비 외함을 납품했다. 명숙은 시연에 참가하지 않았다. 누구도 미발생 손실을 대신 부담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다. 그게 그들이 정확하게 기억하는 전부였다. 오후에는 황복자의 소개로 오래된 임차인 하나를 만났다. 이름은 배정자. 1996년 당시 같은 골목에서 쌀가게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실험이 시작된 뒤 지하에서 가끔 아이 울음소리 같은 게 났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아이를 보지는 못했다고 여러 번 덧붙였다. “처음에는 아기 장난감 소리인 줄 알았어. 그런데 어느 날 남자들이 기계를 끌어 내는데 상자 옆에 글씨가 붙어 있더라고.” “무슨 글씨였습니까?” “가족은 만들어집니다.” 소라가 조용히 반복했다. “가족을 보호한다가 아니고요?” “응. 만들어진다고.” 배정자는 그날의 일을 더듬다가 한동안 말을 멈췄다. 쌀가게를 하던 때에는 옆 가게에서 장부를 다 정리하고 돌아오는 밤이 많았다. 실험장 앞에 있던 사람들이 밥 한 끼 먹고 가라고 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문 안으로 초대한 사람은 한 번도 없었다. “이상한 건 그 남자들이 자꾸 가족사진을 요구했다는 거야. 실제 가족인지 확인할 수 있다면서.” “사진을 내신 적 있어요?” “없어. 그건 왜 필요한가 싶었거든.” 소라가 그 답을 확인하자 배정자는 우빈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그때 사진을 낸 집이 하나 있었어. 가게 맞은편 살던 이들이었지. 지금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몰라.” 정확한 성명은 기억나지 않았다. 우빈이 이름을 맞혀 보려 하자 소라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흐른 증인의 기억에 답을 심어 놓을 수 있었다. 그들은 대신 당시 가게 위치와 간판, 사진을 달라고 했던 날짜에 관한 기억을 분리해 적었다. 밖으로 나오니 눈발처럼 먼지가 날렸다. 명숙이 보내 온 메시지에는 저녁으로 콩나물국을 데웠다는 말이 있었다. 우빈은 답장을 쓰다 멈췄다. 자신의 집을 지키는 동안 한때 사진을 건넸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가족의 삶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면 모른다고 남기기.' 그는 수첩에 적었다. 첫 금고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잊어버렸던 원칙이었다. 그날 저녁 우빈에게 낯선 파일 하나가 전달됐다. 제목은 ‘동림 안전계측 시연 영상 03’. 발신 주소가 없었고, 재생 버튼을 누르자 1996년의 흐릿한 방이 나타났다. 나무 금고 앞에 선 시험 진행자가 말했다. ‘실제 가족의 동의가 없어도 가족 단위 수익과 부담을 생성할 수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화면 아래에는 분명하게 써 있었다. [시연용 가상 세대 / H-001] 다음 순간 남자가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명찰 끝 세 글자가 선명했다. ‘안전총괄 백…’ 영상은 거기서 끊겼다. 우빈은 컴퓨터를 닫지 않았다. 출처를 확인하지 못한 영상은 사실의 실마리일 뿐이었다. 다만 처음으로 ‘H-001’이 자신들의 가족이 아니라 실험을 위해 지어 낸 가짜 세대였을 가능성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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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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