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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62화
PAYLUA ORIGINAL · 제162화

162화. 문틈에 남은 세대번호

빚을 먹는 금고 · 2,364자

오프라인 책장
연화빌라의 주민 대표는 관리비 봉투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황복자는 사용한 봉투에 날짜를 다시 쓰고, 고장 난 형광등을 갈 때는 부품값 영수증을 식탁 유리 밑에 넣어 두었다. 지어진 지 오래된 빌라에서 그런 습관은 불편함보다 든든함에 가까웠다. 우빈이 1996년 지하 임차인의 이름을 묻자 그는 낡은 장부를 꺼냈다. “내가 여기로 온 게 2003년이니까 그 전은 다 몰라. 대신 먼저 살던 분한테 받은 건 있어.” 1996년 9월. 지하를 임차한 상호는 ‘동림 안전계측’. 보증금은 월말 정산. 입주자는 사람이 아니라 ‘시험장비 보관자 1인’으로 적혀 있었다. “가족 단위 실험이라면서 정작 거기 산 가족은 없네요.” 소라가 말했다. 우빈도 장부를 보았다. 세대 기록란은 비어 있었다. 시험 장비가 보관된 장소를 가족으로 등록했다는 뜻일까. 복자는 손가락으로 당시 집주인의 수기 메모를 가리켰다. ‘밤 열한 시 이후 기계 소리. 문 안쪽 두드림에 응답 금지.’ 우빈은 아버지의 작은 나무 상자를 떠올렸다. 장난감처럼 가벼운 상자를 감싸려 만든 것이 아니라면, 안에서 나는 소리를 막는 용도였을까. 지하층은 지금도 사무실로 쓰이고 있었다. 도영식은 수사를 받는 동안 간판을 떼었고, 공간은 폐쇄됐지만 명의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우빈 일행은 건물 소유자와 관리인의 입회 아래 출입 기록을 확인했다. 열쇠는 황복자가 갖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기 전 소라는 황복자에게 주민들의 실제 피해부터 물었다. 옆집 노인이 보여 준 문자에는 ‘빈집 보호 비용 38만 원’이 적혀 있었고, 다른 주민에게는 같은 항목이 ‘연체 지원금’으로 표시돼 있었다. 글씨의 모양과 발신 시각은 같았다. 금액만 달랐다. “자기한테 겁날 법한 말을 골라서 쓰는 것 같아요.” 우빈이 말했다. 황복자는 오래전 수도 계량기 사진을 꺼내 보여 줬다. 지하 사무실이 비어 있던 시기에 시설 점검을 맡은 사람이 입주자 열쇠 없이 출입하려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찍은 사진에는 붉은 택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장치 교체 / 보존번호 01.’ “장치가 뭔지 알았으면 따졌을 텐데.” 복자가 말했다. “계량기 부품인 줄 알았지.” 소라는 그 말을 기록했지만 사진 속 붉은 택이 금고 것이라고 곧장 단정하지 않았다. 같은 번호는 전기 부품에도 흔했다. 우빈은 한때 그랬듯이 숫자를 보고 기뻐할 자신을 경계했다. 일치하는 모양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물건이 실제 어디에서 왔는가였다. 복자는 열쇠를 들면서 잠시 주저했다. “아래에 들어갔다가 또 이상한 일 생기는 거 아냐?” “가까이 있을게요.” 우빈이 대답했다. “위험하면 바로 나올게요. 혼자 감당하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문을 열자 습기가 밴 종이 냄새가 밀려왔다. 도영식의 책상은 치워졌지만 벽을 칠할 때 흘린 페인트 자국과 타일 사이의 틈은 그대로였다. 소라가 벽에 붙은 낡은 검침표를 발견했다. “전기 사용량이 이상해요. 겨울보다 여름에 갑자기 늘었어요.” “장비 때문이겠죠.” “그런데 계량기 명의가 네 번 바뀌었네요. 마지막은 2010년이네요.” 현정이 보내 준 구청 자료에는 건물 용도변경 신청과 함께 부속 도면이 들어 있었다. 1996년 도면의 지하 창고 중앙에는 동그라미가 하나 그려져 있었고, 도면 오른쪽에 설명이 붙어 있었다. ‘무채무 보호장치 시제품 / 사용자 미지정.’ 우빈은 손바닥으로 바닥을 쓸었다. 동그라미가 있던 자리에 철재 받침대를 떼어 낸 자국 네 개가 남아 있었다. 도영식이 놓았던 첫 금고의 위치와 거의 같았다. “누군가 같은 자리에 다시 갖다 놓은 거예요.” 그가 말하는 순간 뒤쪽 문이 저절로 닫혔다. 이명숙이 보내 온 문자였다. ‘우빈아. 우리 문에 새 안내문이 붙었어. 안 열었어. 옆집도 그러네.’ 바닥 타일에 검은 글씨가 번지기 시작했다. [현 거주 세대 12가구 / 일괄 가족 지정] [확정 거부 시: 지하 시설의 미결 책임 상층 세대로 배분] 소라가 발로 종이 조각을 치우려 하자 우빈이 팔을 잡았다. “문구를 건드리지 마세요. 먼저 나가야 해요.” 두 사람이 문을 밀었지만 손잡이는 미동도 없었다. 밖에서 황복자가 다급하게 열쇠를 돌렸다. 현정은 전화로 문이 닫히기 전 촬영한 사진과 당시의 출입 허가를 다시 확인했다. 우빈이 문틀 아래 비뚤어진 경첩을 발견하고 손전등으로 비추자 그곳에 작은 목재 조각이 끼어 있었다. 도장이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태수목공. 1996.’ 문이 열렸다. 우빈은 목재를 봉투에 넣기 전 황복자에게 발견 위치를 직접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복도 스피커가 지직거리며 누군가의 목소리를 냈다. ‘보호받은 집은 값을 내야 합니다.’ 황복자가 대답했다. “우린 보호받겠다고 한 적 없어요.” 스피커는 곧 조용해졌다. 우빈은 그 말이 어떤 서명보다 강력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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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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