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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61화
PAYLUA ORIGINAL · 제161화

161화. 주소가 먼저 서명했다

빚을 먹는 금고 · 2,232자

오프라인 책장
정우빈이 자신의 집 현관에 붙은 낡은 호수를 이렇게 오래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302호. 페인트가 벗겨진 숫자 아래에는 예전 명패를 떼어 낸 네모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문 안쪽에서는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 정태수는 식탁 위에 약봉지를 펼쳐 두고 복용 시간을 맞추는 중이었다. 평범한 풍경 앞에 우빈이 들고 온 서류 한 장만 어울리지 않았다. [1996년 가족 단위 미발생 채무 인수 실험] [실험지: 서람시 연화동 18-7, 지하 1층] [가족관계 코드: H-001] [1차 수익자: 비공개] 주소는 이 빌라였다. 정확히는 도영식이 첫 번째 금고를 내밀었던 지하 사무실이었다. “여기서 살기 전에는 뭐가 있었어요?” 우빈의 물음에 명숙이 접시를 헹구던 손을 멈췄다. “원래 인쇄소였다고 들었어. 그 전에는 작은 창고였나. 왜?” “1996년에 여기서 이상한 실험을 했대요.” 태수가 수첩을 덮었다. 우빈은 아버지의 얼굴이 미세하게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놀랐다기보다 아주 오래전부터 피하고 있던 소리를 다시 들은 사람 같았다. “연화동 십팔 다시 칠?” 태수가 주소를 정확히 읊었다. “아버지, 아세요?” “가구를 배달한 적이 있다. 오래전이지.” 우빈은 서류를 식탁에 놓았다. 아버지는 한동안 첫 줄만 읽었다. 실험 내용까지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그곳에 작은 나무 상자를 갖다 줬어. 금고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도면대로 만들고, 철물은 다른 업체가 달았으니까.” “누가 주문했어요?” “이름이 기억 안 난다. 비닐 우산을 들고 오던 남자였어. 돈은 회사 이름으로 받았고.” 우빈은 오래 묻고 싶은 질문을 삼켰다. 아버지가 무언가 숨긴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30년 된 일이고, 기억은 서류보다 더 쉽게 훼손됐다. 그런데도 지하 사무실과 아버지의 납품 작업이 같은 자리에 닿아 있었다. 현정에게 전화를 걸자 그녀는 자료의 성격부터 짚었다. “주소가 같다고 정태수 씨를 시험 대상자로 결론 내리면 안 돼요. 당시 건물 등기, 입주 기록, 납품 영수증을 따로 확인해야 해요.” “제 가족관계 코드가 붙어 있어도요?” “그 코드가 언제 붙었는지 아직 몰라요. 1996년 서류를 2010년에 고쳤을 수도 있어요.” 말을 마칠 무렵 우빈은 어머니와 함께 예전 주소가 적힌 서류를 확인했다. 가족이 이 빌라로 이사한 것은 아버지가 보증 문제로 집을 잃은 뒤였다. 그 전에는 십 년 넘게 다른 동네에서 살았다. 빌라 근처에 온 이유도 단순했다. 월세가 상대적으로 쌌고, 아버지가 병원으로 다니기 편했다. “그런데 우리가 우연히 여기 온 게 아니면 어떡하죠?” 우빈이 물었다. 명숙은 마른 손으로 종이를 정리했다. “우연이었든 누가 속였든, 그 사실 때문에 여기 산 세월이 전부 거짓이 되는 건 아니잖아.” 우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이 집은 현관 옆에 키를 재며 그어 놓은 작은 선과 아들이 야간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켜 놓던 부엌 등 하나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장부는 그 시간을 ‘가족 단위 점유’라는 네 글자로 바꾸고 있었다. 그는 가계부 맨 뒤에서 작은 전단을 발견했다. 이사 당시 받았던 임대 안내문이었다. 다른 방보다 유독 낮은 월세 옆에 ‘장기 거주 우대’라고 인쇄돼 있었다. 그 아래 작은 활자는 어머니가 볼펜으로 줄을 그어 둔 탓에 겨우 읽혔다. ‘지하 설비의 유지비를 별도 부과하지 않음.’ 어머니는 그 문장을 기억하지 못했다. 실제로 따로 관리비를 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우빈은 그것이 우연한 광고 문구인지, 훗날 책임 전가에 쓰려는 장치인지 확인해야 한다고 수첩에 적었다. 현관 벨이 울렸다. 초인종 화면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빈이 복도를 확인하자 바닥에 얇은 종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실험 당시의 회색 양식지처럼 보였다. [세대 보호 계약 갱신 통지] [현 거주자: 정태수·이명숙·정우빈] [과거 수익의 자동 승계 심사: 오늘 23:59] 종이를 집지 않고 사진을 찍는 동안 옆집 문이 열렸다. 택배 상자를 들고 나오던 노인이 우빈의 손을 쳐다봤다. “우리 집에도 그거 왔어요. 빈집 수리비를 왜 우리가 내라는지 원.” 복도 끝 세 집의 문 앞에 같은 종이가 놓여 있었다. 금고는 우빈 가족만 찾고 있지 않았다. 주소를 따라 현재 사는 사람 모두에게 30년 전의 비용을 넘기려 하고 있었다. 그때 우빈의 휴대전화에 마지막 한 줄이 떴다. [가족관계 코드 H-001의 최초 작성 시각: 2010-06-12] 1996년의 실험서에 찍힌 코드가, 14년 뒤에야 작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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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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