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결제실의 손실 보전 청구서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첫 장에는 ‘보호 기록 미통합으로 발생한 손실’이라고 적혀 있었고, 둘째 장에는 돈의 액수가 없었다. 대신 제출되지 않은 주소의 개수, 자동 정산이 미뤄진 날짜, 미수령자를 확정하지 못한 시간들이 표처럼 늘어서 있었다.
정우빈은 서류 끝을 읽고 허탈하게 웃었다.
“결국 돈도 아니네요.”
“돈이 되지 못한 걸 돈처럼 팔려고 하는 거죠.” 김소라가 대답했다.
박현정은 서류를 분리했다. 실제로 보존에 투입된 비용과 허위로 산정된 손실을 같은 항목에서 처리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강재는 동림기록의 옛 재무 자료와 청구서를 대조했다. 외부 결제실이 주장하는 손실은 1998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은 항목이었다. 2010년의 전산 이관을 거치며 뒤늦게 ‘예상 수익’으로 만들어진 숫자였다.
“실제로 지급하지도, 발생하지도 않은 금액입니다.” 강재가 말했다.
“그럼 누구에게 청구하려는 거죠?”
우빈이 묻자 창문 밖으로 작은 종이 조각이 날아왔다. 조각은 유리를 통과하듯 들어와 책상 위에 앉았다. 그 위에 글씨가 나타났다.
[최초 보존 명령 / 담당자 확인]
[담당자 M-00 / 책임 승계 후보: 정우빈]
“또 나네요.”
우빈은 조용히 웃다가 웃음을 거뒀다. 몇 달 전이었다면 자신의 이름이 찍힌 것만으로 숨이 막혔을 것이다. 지금은 그 문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지 먼저 읽을 수 있었다.
금고의 화면이 어두워지더니 오래된 통신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빈은 회의실에 그대로 서 있었지만, 주변 벽은 1998년의 회색 콘크리트로 바뀌었다. 선반 위에 수십 개의 종이 봉투가 있었고, 가장 안쪽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기록원이 앉아 있었다.
여자의 손이 종이 위를 움직였다. 세모 표시를 그린 뒤 도장을 찍었다.
[보호대상자 인명 정보 / 별도 보존]
잠시 후 문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자료를 넘기면 모두 편해집니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에게 편해집니까?”
“누가 받았는지만 적으면 됩니다. 받았다고 적히면 남은 문제는 정리됩니다.”
“실제로 받은 사람을 확인하지 않았는데요.”
“그러니 일단 넣으라는 겁니다.”
우빈은 말을 걸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기록 속 과거를 보는 듯한 이 장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누군가 편집한 재현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대답 대신 작은 서랍을 닫았다.
“확인하지 않은 건 확인하지 않았다고 남기겠습니다.”
그리고 문밖의 남자가 두 번째 명령을 내렸다.
[격리 해제]
[자료 삭제]
여자가 손을 뻗어 두 명령의 처리를 거부했다. 통신 장치가 짧게 울렸다. 방 안의 모든 기록 표찰에서 그녀의 이름이 지워졌다.
화면이 흔들렸다. 우빈은 다시 2026년의 자료실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문선영이 직접 제공한 축약 목록과 자동 청구서가 놓여 있었다. 그는 낡은 금고를 향해 말했다.
“이 장면은 누가 보여 준 거죠?”
미결이 답했다.
“원본 장치가 보유한 상황 재현입니다. 단독 증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럼 오늘까지 확인한 사실만 쓰겠습니다.”
우빈은 동의받은 증언과 실제 보존 기록을 한쪽에 놓고, 금고 화면 속 재현 장면은 별도 참고 자료로 분리했다. 소라는 문선영의 진술에 포함되지 않은 말을 누군가 뒤늦게 보태지 않도록 확인했다. 현정은 당사자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증거의 경위와 처리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목록을 정리했다.
그들이 마지막 이의 신청을 제출하자 자료실의 바닥이 흔들렸다. 서랍에서 검은 종이들이 솟아올라 회오리처럼 돌았다. 종이마다 ‘수령자 미정’, ‘보상 대기’, ‘보호료 미납’ 같은 문구가 찍혀 있었다. 커다란 손이 천장에 닿을 만큼 자라나 우빈을 붙잡으려 했다.
“최종 부담자 한 명을 기입하라.”
검은 손이 말을 했다. 그 목소리는 첫날 도영식의 목소리처럼 낮았다가, 백재헌의 목소리로 바뀌고, 끝내 우빈 자신의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한 사람만 적으면 끝나잖아.”
우빈은 자신이 언젠가 정말로 했던 말을 들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남의 이름은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던 밤. 그 말을 이제 부정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을 적으면 일이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인생이 잘못 시작될 뿐입니다.”
소라가 옆에서 증언 기록을 펼쳤다.
“누구에게도 공개를 허락받지 않은 주소는 제출하지 않습니다.”
현정이 말했다.
“자료를 보존한 사람과 채무를 부담한 사람은 구별해야 합니다.”
강재가 마지막 결과표를 읽었다.
“1998년의 삭제 명령은 처리 거부됐고, 2010년의 전산 표제는 사실과 불일치합니다. 예상 수익을 실제 손실로 전환한 근거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종이 손의 손목이 갈라졌다. 문서들이 바닥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중 한 장이 우빈의 발치로 떨어졌다.
‘최초 보존 명령 책임 수령 동의서.’
서명란에는 이미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름 옆 서명 시각은 현재가 아니라 1998년 11월 3일이었다. 태어나 있던 우빈이 그날 그곳의 기록원이었을 리도 없고, 서명했다는 증거도 없었다.
우빈은 종이를 찢지 않았다. 대신 앞서 확보한 반박 자료와 함께 그것을 제출했다.
“제 이름이 있다는 사실과 제가 동의했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미결의 화면이 천천히 밝아졌다.
[최초 보존 명령 / 당사자 외 자동 승계: 중지]
[제3채널 증언 / 공개 범위 제한 유지]
[원본 서류 / 봉인 유지]
[외부 결제실의 손실 보전 청구 / 근거 불충분]
[별도 보상·급여 청구권 / 계속 심사]
회오리가 멈췄다. 검은 종이들은 흩어지지 않고 기록용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소라가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금고를 열지도, 부수지도 않았네요.”
“맞아요.” 우빈은 손에 쥔 작은 망치를 내려놓았다. “문 앞에서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하는군요.”
그날 저녁, 그는 아버지 정태수와 어머니 이명숙이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을 보았다. 부엌에는 된장찌개 냄새가 났고, 식탁에서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반찬을 더 먹으라고 권했다. 예전의 빚이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갚아야 할 돈이 있으면 확인하고 갚아야 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책임까지 가족의 이름으로 물려받을 이유는 없었다.
밤 열 시가 조금 지나 문선영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은 제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한 일을 기억합니다.’
우빈은 답장을 작성했다.
‘증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추가로 확인할 내용이 생기면 허락받은 경로로 문의하겠습니다.’
메시지를 보낸 뒤 그는 금고의 전원을 끄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버튼도 누르지 않았다. 금고는 이미 조용했다.
정확히 그때, 현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빈 씨, 방금 새로운 자료가 들어왔어요. 외부 결제실이 2010년 이전에도 같은 청구 방식을 썼다는 증거가 확인됐어요.”
“어느 해인데요?”
“1996년입니다. 삼목 철공소 사고보다도 이 년 전이요.”
우빈은 창밖의 검은 도로를 바라봤다. 도로 위에 달리던 버스가 신호등 앞에 멈췄다. 누군가 버스에서 내리자 문이 닫혔다. 평범한 밤이었다.
현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문서 제목은 ‘가족 단위 미발생 채무 인수 실험’이에요. 첫 번째 시험 대상자의 이름은 가려져 있는데, 가족관계 코드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누구의 코드입니까?”
“확인 중입니다. 다만…”
전화 너머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정우빈 씨가 처음 금고를 발견한 주소와 같습니다.”
우빈의 손끝이 굳었다. 금고가 처음 그의 가족을 찾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서랍 속에서 아주 작은 금속음이 들렸다.
[1996년 최초 실험 / 가족관계 채무]
[1차 수익자: 비공개]
[다음 심사: 가족에게 남긴 것]
우빈은 불 꺼진 방에서 서랍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열어야 할 것은 금고가 아니었다. 자신이 오래 살아온 집의 과거였다.
제16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