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영은 도서관에서 가장 밝은 자리를 골라 앉아 있었다.
짧게 자른 흰 머리와 회색 카디건, 손등에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다. 그녀는 현정이 신분을 밝히기 전에 먼저 종이컵 두 개를 테이블에 올렸다.
“물부터 마셔요. 밤새 돌아다니는 사람들 얼굴이네요.”
우빈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소라는 녹음 여부를 물었고, 하영은 자신의 발언을 문서로 정리하되 사전에 검토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다.
“기억 안 나는 부분은 안 난다고 할 겁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현정이 말했다.
하영은 1998년 11월 5일 새벽, 새벽쉼터 당직실에 있던 상황을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비가 계속 내렸고 건물 전기가 두 번 나갔다. 아이 하나가 들어왔다는 기억은 있었다. 오른손에 작은 상처가 있었고, 젖은 소매를 꼭 쥐고 있었다.
“남자아이였습니까?” 우빈이 물었다.
하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자신이 없어요. 어른들이 ‘동생’이라고 불렀던 것 같기는 해요. 그때 머리카락 길이도, 옷 색도 또렷하지 않습니다.”
“이름은 들으셨습니까?”
“아이가 자기 이름을 말하려는데 누군가 막았던 기억은 있습니다. 보호하려고 그랬는지, 다른 이유였는지는 모릅니다.”
그녀는 가방에서 복사된 작은 메모를 꺼냈다. 원본은 다른 곳에 보관돼 있고, 자신이 허락을 받아 복사한 것이라고 했다.
‘도착자 성명 미확인. 신원 확인 전 아동 본인에게 이름을 강요하지 말 것.’
서명은 없었지만 글씨체는 단정했다. 하영은 당시 오해경이라는 사람이 문 앞에서 자신에게 부탁한 문장이라고 기억했다.
“왜 이름을 강요하면 안 된다고 했을까요?” 소라가 물었다.
“아이가 두려워하고 있었거든요. 누가 이름을 적으면 그 이름이 문 밖까지 따라온다고 했어요.”
우빈의 목 뒤가 서늘해졌다. 금고를 겪기 전이었다면 무서운 아이의 상상이라고 넘겼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름 하나가 계좌가 되고, 주소가 되고, 빚의 담보가 되는 것을 보았다.
“오해경 씨는 그 뒤에 어떻게 됐습니까?”
“한동안 보호소 주변을 오갔던 것 같아요. 아이를 데려가려는 어른과 다퉜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검은 양복이었는지는…”
하영은 말을 멈췄다.
“이런 얘기는 조심해야겠네요. 제가 지금까지 겪은 일을 뒤늦게 같은 사람으로 묶어 버릴 수 있으니까요.”
현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술서의 해당 부분에 ‘인상 미확인’이라고 적었다.
하영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 아이가 종이 한 장을 접어서 저한테 줬어요. 새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배 모양이더군요. 물에 뜨지도 않는 종이배였어요.”
“그 종이는 지금 어디 있나요?”
“찾아봤는데 없었습니다. 다만 종이에 적혀 있던 말은 기억해요. ‘언니는 집에 간다. 나는 아직 이름을 고르지 않는다.’”
나래가 그 말을 들은 것은 같은 날 오후였다. 그녀는 도서관 면담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동의한 범위에서 정리된 진술만 전달받았다. 화면을 읽다 말고 한참 동안 가방 손잡이의 인형을 쓰다듬었다.
“동생이 자주 종이배를 접었어요. 비가 올 때면 물웅덩이에 띄우려고 했죠.”
“그렇다면…” 우빈이 말을 잇자 나래가 손가락을 들었다.
“제 기억과 비슷하다는 거예요. 직접 본 기록은 아니잖아요.”
그날 늦은 저녁, 소라의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왔다. 강민호로 추정되는 성인이 기존에 연락하던 경로로 보낸 것이었다. 자신을 공개적으로 확인해 달라는 부탁이 아니었다.
‘어릴 때 오른손을 다쳤다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이 저라는 증거로 쓰이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제게 있던 종이배 사진 한 장을 제공하겠습니다. 공개 범위는 사건 조사 담당자까지입니다.’
사진에는 찢어진 공책 종이로 접은 작은 배가 있었다. 배의 바닥에는 어린아이 글씨로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다른 문.’
우빈은 사진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1998년 오해경이 열어 둔 문은 단 하나가 아니었다. 동백여관 후문에서 A와 B가 서로 다른 경로로 나간 뒤, 누군가가 그 두 경로를 하나의 ‘인계 실패’로 묶어 버렸다.
그때 현정에게서 긴급 연락이 왔다.
“새벽쉼터 운영 수첩에 접근하려는 사람이 있어요. 담당 팀장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정식 요청서가 아니라 ‘정정 완료 확인증’을 들고 왔답니다.”
“누가요?”
“검은 장갑을 낀 사람이라고 합니다. 현장 직원들은 수첩을 별도 보관 장소로 옮겼고, 경찰에 확인을 요청했어요.”
우빈은 창밖의 골목을 바라봤다. 가로등 아래 검은 자동차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갔다.
[대상자 B / 인계 확정까지 17:06:12]
[확정 시 보호 기록 최초 작성자에게 소급 청구]
금고는 이제 B의 현재 삶만이 아니라, 그 아이를 보호하려 했던 사람의 과거까지 가져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거슬러 올라간 이름은 오해경이었다.
제14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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