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아직 골목에 닿지 않았다.
제2정산소 밖으로 나온 열두 사람은 도로가 정상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차가 지나가고, 가로등이 깜빡이고, 새벽 첫 버스가 정류장에 섰다. 그들은 조금 전 자신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쉽게 설명하지 못했다.
소라는 사람들에게 연락처를 받아 적기 전에 먼저 허락을 구했다. 신고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보내 주었다. 기록에 남는 것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우리도 밖으로 나왔으니 끝난 거죠?" 배달 기사가 물었다.
"일단 오늘은 거기 돌아가지 마세요. 아까 받은 서류는 사진만 남기고 봉투째 봉해 두세요."
소라의 설명에 그는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빈은 경찰이나 은행에 신고하면 곧바로 모든 일이 풀릴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미 이름과 금액이 바뀌는 서류를 본 이상 그런 장담은 무책임했다.
서강재는 가로등 아래서 휴대전화를 살폈다.
"공개 심사가 일출 전까지라면 지금 원형 시험실로 가야 합니다. 이정민 씨 기록도 거기에 있을 겁니다."
소라는 그의 말에 즉시 걷기 시작했다. 우빈은 나래를 흘끗 보았다. 작은 아이가 자신들의 뒤를 무릎 하나 간격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집이 어딘지 기억나니?"
"예전에는 있었어요. 빨간 지붕이었고, 문 옆에 귤나무가 있었어요."
"어느 동네였는데?"
"그건 기억이 안 나요. 집이 사라졌대요."
소라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래는 소라의 표정을 보다가 급히 덧붙였다.
"저 때문에 찾으러 가지 않으셔도 돼요. 자꾸 누가 저한테 그러거든요. 찾으러 가면 다른 사람이 없어질 수 있다고."
"누가 그렇게 말했어?"
"금고 안에 있는 남자요. 이름을 아는데 부르면 안 된다고 했어요."
삼목 철공소에 도착했을 때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이전에 다녀왔던 작업장 바닥에는 밤새 쌓인 듯한 톱밥이 있었지만, 벽의 공구들은 낡은 채로 제자리에 걸려 있었다. 아버지가 이런 곳에서 마지막까지 사람을 구할 방법을 찾았다는 생각에 우빈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도면에 표시된 바닥을 두드렸다. 같은 콘크리트처럼 보였는데 한쪽만 소리가 비었다. 망치 손잡이를 쥔 채 쇠 지렛대를 끼워 올리자 바닥판이 들렸다. 아래에서 먼지와 뜨거운 쇳내가 올라왔다.
지하에는 작은 시험실이 있었다. 선반마다 표본 병이 놓였고, 벽 한쪽에는 '대출 채권 추적 시험'이라는 이름의 종이 서류철이 쌓여 있었다. 돈을 빌려준 사람을 특정하기 위한 원래 목적이 그 제목에 남아 있었다.
소라는 서류철의 날짜를 순서대로 읽었다.
"여기 처음엔 피해자의 채무를 실제 채권자에게 돌려보내는 실험만 했네요."
"그런데 언제부터 사람이 담보로 들어갔는지 봐야 해요."
서강재는 두꺼운 장부에서 몇 장을 넘겼다. 낡은 인주 자국 아래 대출 약정서가 붙어 있었다. 첫 실험의 채무자는 어느 공장 노동자였고, 회수해야 할 상대는 서류를 조작한 금융업자였다.
처음 실험은 성공했다. 피해자의 빚이 원래 책임자에게 돌아갔고, 돈을 빌려준 사람도 기록에서 확인됐다.서류 가장자리에는 정태수가 연필로 그려 둔 작은 삽화가 있었다. 망치와 톱, 저울. 그 옆에 '잘못 걸린 추를 제자리에 옮겨 놓는다'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복잡한 수식을 일상적인 물건으로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우빈은 시험대 아래 서랍을 하나 더 열었다. 안에는 상처 난 나무토막 수십 개가 있었다. 토막마다 피해자의 이니셜과 시험 날짜가 적혀 있었다. 하나에는 모서리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검은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늘 하던 짓이에요."
"뭘요?" 소라가 물었다.
"고장 난 기계를 고치면 버리는 부품을 꼭 남겨 뒀어요. 어디가 잘못됐는지 다음엔 알아야 한다고."
그는 나무토막을 뒤집었다. 구멍 난 면에 작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첫째, 당사자를 확인한다. 둘째, 상대방을 확인한다. 셋째, 제삼자 책임을 만들지 않는다.'
"원래 설계는 간단했네요."
소라가 말했다. 서강재는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내가 회수 담당자로 일할 때는 이런 규칙을 교육받지 못했습니다. 원래부터 교육받지 않은 건지, 누군가 빼 버린 건지 모르겠군요."
"누군가 빼 버렸겠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규칙이니까요."
서강재는 반박하지 않았다. 우빈의 말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것을 아는 얼굴이었다.
벽면의 오래된 도장 함을 열자 일부 고무인이 칼로 잘려 있었다. '확인되지 않음'이라는 도장은 '확인됨' 부분만 남았고, '동의하지 않음'은 '동의'만 남았다. 아주 적은 글자를 지우는 것으로 뜻을 뒤집을 수 있었다.
소라는 잘린 도장을 투명 봉투에 넣었다. 누가 언제 손댔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원래 무엇이 달라졌는지 보여 주는 증거였다.
"어떤 사람은 도장 하나로 남의 인생을 바꿨네요."
그녀의 말에 우빈은 잘린 고무인을 오래 바라봤다. 아버지의 공방에서는 글자를 잘못 파면 목재 전체를 갈아 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잘못 파인 글자를 이용해 돈을 벌었다.
두 번째도 성공했다.
세 번째에는 문제가 생겼다.
[원 채권자: 기록 말소]
[대체 청구권자: 미지정]
[잠정 보관: 00]
"원래 채권자가 없었단 말인가요?" 우빈이 물었다.
"아뇨. 기록을 누가 없앤 겁니다. 채권자가 특정되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청구할 수 없어야 해요. 그런데 누군가 빈칸을 남겨 둔 채 절차가 계속되도록 바꿨어요."
소라는 시험대 위에서 유리병 하나를 발견했다. 병 안에는 낡은 어린이 양말 한 짝이 들어 있었다. 라벨에는 '목격자 반응 실험, 1998.11.03'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래가 멈춰 섰다. 그녀의 신발 한쪽이 젖은 이유를 우빈은 그제야 알아봤다. 양말이 병 안에 보관된 쪽 발에서만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게 네 것이야?"
나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비가 왔어요. 누가 저를 여기 데리고 왔죠. 책상 밑에 숨어 있었는데, 어른들이 서로 소리 질렀어요."
그녀는 숨을 골랐다.
"하나가 말했어요. '아이가 보면 안 돼.' 또 하나는 '이미 봤어'라고 했고요. 그다음부터 아무도 제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우빈은 아이의 발목을 내려다봤다. 희미한 숫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목격 대가: 미정산]
나래는 자신이 몇 살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주 오래전 일을 기억하는데 키와 몸은 자라지 않았다. 이 아이가 실제 살아 있는 사람인지, 금고가 보관해 온 기억인지 판단할 증거는 아직 없었다.
소라는 시험실 구석에 놓인 카세트 녹음기를 찾았다. 전원선은 끊겨 있었지만 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서강재가 수동 재생 장치를 찾아 연결하자 잡음 속에서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정민이에요. 세 번째 실험은 중단해야 해요. 도기철 씨가 기록을 바꿨어요. 돈의 주인이 없는 게 아니라……'
녹음이 끊겼다. 이정민의 목소리였다. 소라는 테이프를 두 손으로 감쌌다.
"엄마 목소리가 맞아요."
다음 부분이 재생됐다.
'채권자 칸을 비운 사람은 따로 있어요. 그 사람이 받는 이익을 찾아야 해요. 돈은 사라지지 않아요. 여기선 사람한테서 빠져나갈 뿐이에요.'
테이프가 천천히 끝으로 감겼다. 마지막에 세 번의 망치질 소리가 들렸다. 정태수가 일하던 소리였다.
그 뒤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기록은 남겨 둬. 나중에 우리 아들이 보게 될 거야.'
우빈은 아버지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런데 문장이 이상했다. 1998년이었다. 그때 자신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재생 버튼이 저절로 다시 눌렸다. 테이프가 거꾸로 돌아가며 새로운 글자가 기계의 유리창에 나타났다.
[녹음 대상: 미래의 원본 후보 정우빈]
[녹음일: 1998년 11월 3일]
제1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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