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아이의 발을 잡았다.
나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이미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은 사람처럼 벽 쪽으로 끌려가면서도 번호표를 놓지 않았다. 우빈이 몸을 던져 아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차가웠다. 살아 있는 아이의 온도가 아니었다.
"나래야, 손 놔! 번호표!"
"놓으면 제가 없어져요."
우빈은 말을 멈췄다. 어른들은 빚을 없애려고 번호표를 쥐고 있었는데, 아이는 없어지지 않으려고 쥐고 있었다. 똑같은 종이가 정반대의 의미가 된 것이다.
서강재가 검은 그림자 앞으로 나섰다.
"회수자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집행번호를 밝히시오."
그림자가 잠시 주춤했다. 벽에서 타자기 치는 소리가 났다.
[집행번호: 00-13]
[목표: 무기명 목격자]
[회수 근거: 증인 없음]
"증인이 없다고?"
소라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대기석에 있던 열두 사람이 하나같이 눈을 피했다. 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조금 전까지 저들이 겪은 공포도 진짜였으니까.
"저 아이를 봤어요?"
소라는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 있는 걸 보셨으면 그 사실만 말씀해 주세요. 서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맨 앞 노인이 손을 들었다.
"봤어요. 번호표 뽑는 기계 아래 앉아 있었어."
기름 얼룩이 묻은 여자도 말했다.
"신발이 한 짝 젖어 있었어요. 제가 봤습니다."
"저도요."
배달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겹치자 그림자가 한 번 뒤틀렸다. 벽에 붙은 종이에서 '증인 없음'이라는 문장이 지워졌다.
[독립 목격 진술: 3건]
[회수 적법성 재검토]그림자는 완전히 풀려나지 않았다. 나래의 신발과 벽을 잇는 검은 끈 한 줄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목격자들이 입을 닫는 순간 다시 굵어졌다.
"계속 말해야 합니까?" 노인이 물었다.
서강재가 눈살을 찌푸렸다.
"인정된 진술은 남아야 하는데, 저쪽에서 기록을 받지 않으면 취소할 수 있습니다."
"그럼 누가 받아요?"
"여기서는 시스템이죠."
우빈은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불분명한 기계의 승인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는 노인에게 말했다.
"방금 말씀하신 걸 다른 분께도 직접 이야기해 주세요. 누가 듣는지 서로 알아야 기록을 바꿀 수 없을 겁니다."
기름 얼룩이 묻은 여자가 노인을 바라봤다.
"할아버지가 봤다는 걸 제가 들었어요. 저는 신발이 젖은 것도 봤고요."
배달 기사도 돌아섰다.
"두 분 이야기 다 들었습니다. 저도 그 아이를 봤어요."
세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향하자 벽에서 검은 끈이 떨어졌다. 종이가 타는 냄새 대신 오래된 비누 냄새가 났다. 그림자에게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래는 자기 발목을 만졌다. 작은 새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많이 저를 본 사람은 처음이에요."
"그전에는 아무도 없었어?"
"봤다가 잊었어요. 금고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나중에 자기가 뭘 봤는지 모르게 되거든요."
우빈은 손끝에 한기가 돌았다.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기억 자체가 지워졌다면, 나래가 얼마나 오래 여기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사라진 그림자를 내려다봤다. 누군가의 목격자로 남는 일과 누군가의 대체 책임자가 되는 일 사이에는 아주 얇은 선이 있었다. 기계는 그 선을 없애려 했다.
그림자가 나래의 발을 놓았다. 아이는 우빈의 품으로 넘어졌다. 작은 어깨가 빠르게 떨렸다. 우빈은 번호표를 억지로 빼앗지 않았다.
"봤다고만 해도 멈추는 거네요."
우빈이 말했다. 서강재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예전 회수 지침에는 이런 절차가 없습니다. 삭제된 조항이 살아난 겁니다."
"원래부터 있었던 거겠죠. 누군가 지운 거고."
소라는 말하며 목격자들의 동의를 얻어 진술 시각을 수첩에 적었다. 전자 서명을 받지도, 주민번호를 묻지도 않았다. 비슷한 사건이 다시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자기 기억을 확인할 수 있게 남기는 기록이었다.
나래는 울음을 참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는 금고 안에서 나왔어요."
우빈은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무슨 뜻이야?"
"원래 여기 있는 사람이 아니래요. 누가 아주 오래전에 저를 빌렸대요. 그런데 아무도 갚으러 오지 않았대요."
아이의 말은 끊어졌다. 자신에게 생긴 일을 설명하는 데 쓸 단어를 찾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서강재가 도면을 펼쳤다. 나래가 들고 있던 종이는 정산소 배치도가 아니었다. 훨씬 오래된 공방의 지하 설계도였다. 모서리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1998년 11월 3일.
"금고 원형을 만든 날이네요."
소라가 말했다. 설계도에는 손으로 그린 네모 세 개와 작은 원 하나가 이어져 있었다. 그 옆에 정태수, 이정민, 도기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원의 중앙에는 빈칸이 남아 있었다.
"빈칸에 누구 이름을 적는 설계였죠?"
"아이 이름이요."
나래가 대답했다.
정산소 벽이 갑자기 울렸다. '접수'라는 안내등이 켜지고 천장 스피커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나왔다.
"무기명 계정에 대한 불법 열람이 확인되었습니다. 모든 고객은 제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오."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우빈은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려고 문쪽으로 달려갔다. 열두 사람 중 아홉 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세 명은 봉투를 붙잡은 채 망설였다.
"밖에 나가면 또 독촉받을 텐데요."
식당 주인이 울먹였다.
"당장 빚을 해결하지 않고선 돌아갈 곳이 없어요."
우빈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서 해결해 준다는 말이 거짓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을 시간을 벌어야죠. 지금은 우선 밖으로 나가요. 동의 안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위험한 걸 알면서 혼자 계시게 할 수는 없어요."
그는 손을 내밀어 기다렸다. 식당 주인은 한참 뒤 손을 잡았다. 나머지 두 명도 천천히 뒤따랐다. 누군가 그들의 결정을 대신 내려 주지는 않았다.
그때 나래가 말했다.
"아저씨는 안 나가요?"
"우리가 봐야 할 게 남았어."
"그러면 저도 갈래요. 제 이름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요."
우빈은 서강재를 바라봤다. 그는 아이의 도면 뒤편을 뒤집었다. 지도의 맨 아래 적힌 주소를 읽고 숨을 삼켰다.
'삼목 철공소 구지하 1층. 원형 시험실.'
"그 장소는 폐쇄됐다고 들었습니다."
"폐쇄된 거랑 사라진 건 다르죠."
우빈은 나래에게 자신의 외투를 건넸다. 아이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소매를 접어 입었다. 외투가 조금 컸다.
모두가 문을 통과하기 직전, 닫히던 전광판이 한 번 더 켜졌다.
[목격자 13명 등록]
[원본 소유자 이의 신청 요건 충족]
우빈은 숫자를 다시 세었다. 열두 사람과 아이 하나. 그러나 방금 사람들을 밖으로 안내한 소라와 서강재, 자신까지 세면 열여섯 명이었다.
누가 빠진 것일까.
그때 나래가 자기 그림자를 돌아봤다. 벽에는 아주 작은 아이의 그림자가 생겨 있었다. 대신 우빈의 그림자가 없었다.
"아저씨."
나래가 속삭였다.
"이번에는 아저씨가 열세 번째가 됐어요."
제1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