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빈은 서람시장 열쇠 가게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명숙은 수화기를 받자마자 밥은 먹었느냐고 물었다. 우빈은 대충 먹었다고 대답하려다가 실제로는 점심을 거른 것이 생각났다. 그는 아직 안 먹었다고 정정했다. 금고와 싸우는 동안 자신이 가장 자주 하는 일이 거짓된 기록을 바로잡는 일이 되었는데, 정작 가족에게는 작은 사실을 쉽게 숨기고 있었다.
“늦게라도 먹어.”
“네. 어머니, 혹시 1998년 11월 4일 기억나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멈췄다.
“그때 네 아버지가 사고 때문에 집에 못 왔을 때지.”
“맞아요. 그날 어머니는 뭘 하셨어요?”
“글쎄다. 스물여덟 해 전 일을 누가 다 기억하겠니.”
“특별한 일이 있었으면…”
“특별한 일이 없었다는 게 특별한 날도 있어.”
명숙은 잠시 침묵했다. 그런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저녁 네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어. 집에 오지 못한다고, 같이 있던 사람들 이름을 적고 있다고. 나는 전화를 끊고도 한참 기다렸지. 그런데 다음 날 전화가 또 왔어. 자기가 이미 집에 들렀다고 하더구나.”
우빈은 걸음을 멈췄다.
“아버지가 집에 왔다고요?”
“나는 못 봤어. 그런데 아버지는 분명 문 앞에 섰다고 했어. 우리가 싸운 줄 알았지. 그 뒤로 그날 이야기는 잘 안 했어.”
우빈은 어머니에게 추측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남아 있는 전화 통화 기록이나 일기 같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명숙은 오래된 가계부 상자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우빈은 집에서 부모를 마주했다. 태수는 자신이 사고 다음 날 집에 왔다고 말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명숙이 거짓말을 한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날은 너무 피곤했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
명숙이 종이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오래된 공과금 고지서와 병원 영수증, 1998년 달력이 들어 있었다. 11월 4일 칸에는 작고 반듯한 글씨가 있었다.
‘태수 기다림. 전화 두 번. 마지막 통화 21:30.’
그 다음 날에는 조금 굵은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태수는 어제 왔다고 함. 열쇠는 그대로.’
가계부를 본 태수의 눈이 빨개졌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아내가 적은 두 줄을 바라봤다.
“왜 나한테 이걸 보여 주지 않았어?”
“보여 줬지. 당신은 기억이 안 난다고 했고.”
“미안해.”
“미안한 일인지도 아직 모르잖아.” 명숙이 대답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알아보자.”
그 한마디가 우빈에게는 금고를 열 수 있는 열쇠보다 귀했다. 누군가 먼저 자신에게 죄를 덮어씌우거나 대신 용서를 요구하지 않고,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부터 허락하는 말이었다.
그때 서랍 안에 있던 오래된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다. 전원이 끊긴 지 십 년이 넘은 유선 전화기였다. 태수가 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정태수 씨, 집에 돌아오셨습니까?’
기계음 같은 목소리였다. 태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가 확인이 없으면 1998년 11월 4일의 잔여 시간을 연장합니다. 대리 귀가를 선택하십시오.’
“누구십니까?” 태수가 물었다.
‘퇴근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빈이 전화기에 다가갔다. “그건 사람 이름이 아니잖아요.”
잠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름이 없다면 의무도 종료되지 않습니다.’
“아니요.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하루를 가져갈 순 없어요.”
수화기에서는 답이 없었다. 대신 전화기 아래에 놓여 있던 가계부 종이가 스스로 뒤집혔다. 그 뒷면에는 명숙이 쓴 적 없는 문장이 떠올랐다.
[정태수 / 귀가 미확인]
[이명숙 / 대리 기다림 승인]
명숙이 얼굴을 굳혔다. 그녀는 분명 아버지를 기다렸지만, 누군가의 의무를 대신 맡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내가 기다린 건 남편이지, 회사 일이 아니야.”
그녀는 가계부를 제자리로 놓았다. 그러자 전화기에서 검은 선이 튀어나와 그녀의 손목을 감으려 했다. 우빈이 먼저 손을 뻗었지만 명숙이 그를 멈췄다.
“내가 말할게.”
명숙은 수화기에 또렷하게 말했다.
“나는 그날 밤 집에 있었어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고요. 그렇다고 누구 대신 출근하거나 빚을 받은 건 아닙니다.”
검은 선이 천천히 풀렸다. 전화기에서는 통화 종료음이 울렸다. 작은 화면에 문자 하나가 나타났다.
[대리 귀가 거부 접수]
[원소유 하루: 당사자 직접 확인 필요]
태수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말했다.
“내가 그날 집에 왔다고 말한 이유를 기억해 내고 싶어.”
우빈은 아버지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휴대전화에는 소유권 확인까지 열여섯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과거를 억지로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대신 명숙의 가계부를 날짜별로 촬영하고, 당시 전화기 수리 기록을 찾아보기로 했다.
현관문을 나서던 우빈의 발밑에 작은 봉투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봉투 앞면에는 오해경의 이름 대신 두 단어가 적혀 있었다.
‘퇴근 증인.’
안에는 녹슨 열쇠 하나와 짧은 편지가 있었다.
‘문은 열쇠로 여는 것이 아닙니다. 나간 사람과 남은 사람을 각각 세어야 합니다.’
제13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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