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의 초록불이 꺼지고 나서도 정우빈은 창가를 떠나지 못했다.
낡은 작업화를 신은 여자. 발끝을 조금 바깥쪽으로 벌리고 서 있던 자세. 그리고 무엇보다 급여봉투에 적힌 이름. 그 모든 것을 보았는데 얼굴만 기억나지 않았다. 여자에게 얼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빈이 눈을 감고 떠올리려 할 때마다, 누군가 검은 종이를 얼굴 위에 덧붙이는 느낌이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박현정이 그를 불렀다.
“우빈 씨. 들립니까?”
“네. 밖에 사람이 있었어요. 오해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투를 들고요.”
“지금 쫓아가지 마세요. 같이 확인해야 합니다. 어디에서 봤는지부터 적어 주세요.”
우빈은 현정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았다. 금고가 보여 주는 물건에는 언제나 손쉬운 답이 붙어 있었다. 한 번 따라가면, 한 번 서명하면, 한 사람만 대신 나서면 끝난다는 말. 그 끝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그동안 충분히 보았다.
그는 창틀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 열 시 십일 분. 탁자 위 메모지에 시각과 횡단보도 위치, 여자의 신발과 봉투 모양을 적었다. 적고 나니 기억이 조금 덜 흐려졌다.
“제가 내려가서 근처를 볼게요. 다른 사람한테도 연락해 주세요.”
거리로 내려왔을 때는 신호가 두 번 바뀐 뒤였다. 편의점 직원이 출입문 앞을 쓸고 있었다. 우빈은 여자의 차림을 설명했고, 직원은 길 건너 버스 정류장을 가리켰다.
“봉투 든 분이라면 저쪽에 앉아 계셨어요. 버스는 안 타고. 동전 떨어뜨린 것처럼 바닥을 한참 보시던데.”
정류장 의자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에 밀려온 영수증 한 장이 의자 다리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우빈이 그 영수증을 집으려다 손을 멈췄다. 종이에 검은 글씨가 떠올랐다.
[분실물 접수 / 급여봉투 1점]
[수령 예정자: 최초 근무 확인자]
[담보 확인까지 47:31:08]
“또 시작이군.”
그는 종이를 맨손으로 잡지 않았다. 사진을 찍고, 정류장에 설치된 분실물함 번호와 함께 현정에게 보냈다. 그런데 휴대전화 화면에서 영수증의 글씨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시내버스 교통카드 충전 내역뿐이었다.
반대편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김소라가 코트를 걸치고 뛰어왔다. 우빈의 연락을 받은 현정이 가까이 있던 소라를 보낸 모양이었다.
“아직 있어요?”
“사람은 없고, 종이만요. 사진에는 아무것도 안 나왔어요.”
소라는 정류장 뒤편의 작은 꽃가게를 바라보았다. 가게 셔터는 절반 내려와 있었고, 내부에는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그녀는 유리창에 손을 댔다.
“여기요. 안쪽에서 보면 반사가 달라요.”
유리에는 정류장이 비쳤다.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젖은 작업복에 손목시계를 찬 여자였다. 현실의 의자는 비어 있었지만, 반사된 의자에는 사람이 선명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봉투를 열고 있었다.
우빈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반사도 사라졌다.
“보셨어요?”
“봤어요.” 소라가 대답했다. “그런데 얼굴은 못 봤어요.”
두 사람은 같은 것을 보았다는 사실보다, 같은 것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 불안해졌다.
가게 주인이 소리를 듣고 나왔다. 머리가 희끗한 남자는 그들에게 근처에 누가 쓰러졌느냐고 물었다. 우빈은 보이는 현상을 빼고 사실만 이야기했다. 급여봉투를 든 사람이 정류장에 있었다는 목격담이 있고, 분실물이 남았을 가능성이 있어 확인 중이라고.
“봉투요?” 주인은 잠시 생각했다. “아까 여자 한 분이 와서 오래된 종이를 복사해 달라고 했어요. 여기는 꽃가게라 복사기가 없다고 했더니, 꼭 원본을 남겨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그분이 무슨 말씀을 더 하셨습니까?”
“잃은 하루를 찾으려면 그날의 아침이 아니라, 다음 날의 아침을 찾아보라고요.”
주인은 그 말을 전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가 인사를 하고 떠난 뒤, 카운터 위에 봉투 하나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가게의 불빛 아래 놓인 봉투는 습기를 먹어 살짝 휘어 있었다.
우빈은 봉투를 열지 않고 현정에게 연락했다. 주인의 동의를 받아 물건을 보존했고, 다음 날 관리원에서 함께 확인하기로 했다. 소라는 주인에게 방금 들은 말을 그대로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가게 셔터를 내리려던 주인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이상한 게 하나 있어요. 여자분이 봉투를 놓고 갔다는 시간에는 내가 여기에 없었습니다. 폐점 정리하러 잠깐 창고에 갔거든요.”
“그럼 어떻게 본 거죠?”
“분명 이야기는 했는데, 언제 했는지가 생각 안 나요.”
그의 손목시계는 열 시 십일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빈이 밖에서 확인한 시각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열 시 사십칠 분이었다.
꽃가게의 다른 시계들은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멈춘 것은 오직 그 남자의 손목시계뿐이었다. 남자는 시계를 풀어 탁자에 놓았다. 그러자 시계 뒷면에 얇은 글씨가 나타났다.
[차용된 36분]
[원소유 일자: 1998-11-04]
우빈은 그 숫자를 수첩에 옮겨 적었다. 원본 장부가 빼앗으려는 것은 스물네 시간짜리 하루가 아니었다. 어쩌면 누군가 살아낸 시간을 잘게 나누어,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넘기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그 순간 정류장 안내판에 도착 예정 버스 대신 글씨가 떴다.
[첫 번째 수령증 발급]
[수령인: 정우빈]
우빈은 봉투에서 손을 떼었다. 자신은 아직 아무것도 받겠다고 한 적이 없었다.
제131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