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은 내가 닫았다.”
정태수는 조사실에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뒤에 다른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날 일한 사람들 시간을 내가 대신 가져갈 수는 없다.”
장은서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아직 개명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며, 진술서에는 법적 이름과 당시 사용한 이름을 구분해 적어 달라고 했다. 현정은 두 이름 사이를 잇는 자료를 별도로 보존하고, 공개되는 서류에는 은서가 동의한 범위만 남기기로 했다.
“지금 이름은 장가현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날을 이야기할 때는 장은서라고 불러 주세요. 그때의 내가 일을 했으니까.”
우빈은 그녀를 바라봤다. 이름을 바꾼다고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과거의 이름을 되찾는다고 지금의 삶을 모두 내놓을 이유도 없었다.
소라는 태수에게 진술을 중단할 권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미친 영향을 끝까지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가현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듯했다. 그는 손목의 붕대를 자꾸 만졌다. 태수는 미안하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자리에서의 사과가 가현에게 또 다른 대답을 강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먼저 기록을 듣고,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했다.
태수는 처음 받은 질문부터 대답했다. 자신이 철공소의 근무 확인자가 되었던 이유. 사고 당일 폐업 정리 담당자는 현장에 오지 않았다. 젖은 종이 출근부가 엉망이 되자 그가 임시로 작업 시간을 적었다. 현장을 관리하던 인부들 가운데 글씨가 비교적 또박또박한 사람이라는 이유였다.
“오 반장이 사람을 불렀고 나는 시간을 적었습니다. 그 기록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적은 종이에 여덟 번째 줄이 있었습니까?” 소라가 물었다.
“있었어. 그 사람은 적어 두지 말라고 했거든.”
“왜요?”
“그날 임금을 받으러 온 사람이 아니라고 했어. 구조를 도우러 왔다고.”
우빈이 벌떡 일어섰다. “그럼 마지막 교대자는…”
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누구인지 확실치 않아. 그런데 그 사람의 말을 들은 기억은 있어. 임금을 청구하겠다는 게 아니라, 일한 사람들을 정리해서 집으로 보내라고.”
가현은 한참 침묵했다가 자신이 보관해 온 종이를 테이블에 펼쳤다. 1998년 종료 확인서에서 한 사람의 서명이 다른 종이 위에 덧써진 흔적이 있었다. 인주가 번진 자국 같았지만, 확대하면 글씨를 지운 흔적이었다.
“여기요.” 그녀가 말했다. “그날 뒤에 회사 사람이 이 표를 달라고 했어요. 제가 안 주니까 새 종이를 써 왔죠. 모두 퇴근하지 않았다고.”
그 새 종이에 태수의 이름이 있었다.
[근무 연장 확인자: 정태수]
[작업 종료 예정: 인원 전원 확인 시]
“누가 써 왔죠?” 소라가 물었다.
“기억나요. 검은 우비를 입은 남자였어요. 신발은 깨끗했고 손에는 장갑을 꼈죠. 비 오는데도 우산을 안 들고 왔어요.”
우빈은 검은 양복의 회수자를 떠올렸다. 그러나 태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소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이 지금의 회수자와 같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어요. 옷차림이 비슷하다는 것만으로는요.”
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계속 말했어요.”
그 순간 태수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늘어났다. 그림자는 앉아 있는 태수와 달리 작업 장갑을 끼고 있었다. 허공을 가르며 문을 잠그는 동작을 반복했다. 잠글 때마다 벽시계가 한 시간씩 뒤로 움직였다.
[정태수 / 근무 확인자]
[책임 승계 승인 시 타 근로자 퇴근 처리]
태수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한 번 승인하면 모두 풀려난다는 거냐?”
미결이 뿌연 창문에 나타났다. “승인 시 다른 사람들의 미지급 시간이 정태수 씨의 평생 근무 시간으로 이전됩니다. 실제로 받은 임금이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생이라는 게 얼마인지…” 태수가 중얼거렸다.
“산정되지 않습니다.” 미결이 말했다. “그러므로 종료 시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태수는 종이를 내려다봤다. 우빈은 아버지가 또다시 혼자 문을 닫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도 여러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한 명의 말을 무시했을 것이다. 지금도 여러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자신의 이름을 내놓을지 몰랐다.
“아버지. 하지 마세요.”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라면?”
“책임을 지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계약을 받아들이는 건 다르잖아요.”
태수는 아들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사고 이야기를 꺼낼 때보다 지쳐 보였다.
“난 그게 아직 어렵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뭘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럼 우리가 같이 확인해요. 아버지가 한 일만요.”
가현이 서류를 밀었다. “그날 아저씨 잘못한 일 있습니다. 하지만 제 시간까지 아저씨 것이 되는 건 싫어요. 저는 제 일을 했어요.”
태수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 말은 용서보다 무거웠다. 그가 가져갈 수 없는 타인의 삶을 눈앞에 두었기 때문이다.
현정이 조사 기록에 가현의 발언을 남겼다. 태수도 근무를 확인했던 사실과 새 서류에 동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분리해 기록했다. 벽에 붙은 그림자가 버둥대더니 손목의 장갑이 벗겨졌다.
그러나 그림자 손바닥에 다른 글씨가 나타났다.
[BJH-00 / 근무 시간 인수 완료 예정]
[예정 시각 03:17]
“백재헌 계정이 최종 인수자라고요?” 강재가 물었다.
미결은 그 글씨를 보고 뒤로 물러섰다. “그 계정이 인수할 수 있는 것은 노동시간이 아니라, 노동시간에 붙은 징수 권한입니다.”
“임금을 안 주고도 받을 돈을 만들어 놓은 거군요.” 소라가 말했다.
태수의 그림자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휴대전화에서는 오래전 철공소의 기계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전화 너머에서 말했다.
‘정태수 씨, 시간표는 잘 받았습니다. 이제 문만 한 번 더 잠가 주십시오.’
태수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 문장이 그날 자신의 선택 뒤에 따라왔던 말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제12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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