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수가 기억하는 붕대는 손목에 감겨 있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이었어. 붕대 끝을 매듭짓지 않고 작업복 안으로 넣었지. 손을 씻을 때 젖지 않게 하려고.”
서람 노동기록보존센터의 작은 열람실에서 태수는 연필로 한 남자의 손을 그렸다.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처음에는 확신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굵었고, 두꺼운 방수복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났다.
우빈은 종이를 보며 오래 참았던 질문을 꺼냈다.
“왜 지금껏 말하지 않으셨어요?”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아니, 잊어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태수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사고가 난 뒤에는 내가 문을 닫았다는 말만 수십 번 했어. 다른 사람들을 얘기하면 변명한다고 생각할까 봐. 그러는 사이 정말 잊었지.”
소라는 그 문장에 표시를 했다. ‘기억의 빈칸.’ 그것은 책임을 없애지는 못하지만 사실을 찾는 데 필요한 부분이었다.
우빈은 연필로 그린 붕대 그림을 접지 않았다. 너무 허술해서 어디에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손을 그리던 아버지의 표정에는 이상하게 정확한 것이 있었다. 눈을 그릴 때는 망설이지만, 붕대 끝이 젖지 않게 숨겨진 방향은 몇 번이고 같은 곳을 가리켰다. 기억은 마음대로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작은 사실이 맞물릴 때, 잊힌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는 있었다.
보존센터 직원이 1998년의 작업 보조 인력 증언 묶음을 가져왔다. 당시 산재 처리 기록 가운데 일부는 제보자 요청으로 실명이 가려져 있었다. 직원은 법적 절차 없이 이름을 열람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 사람을 찾으려면 먼저 어떤 자료가 남았는지 알려 주세요.” 현정이 말했다. “신원을 공개하라는 게 아닙니다.”
담당자가 열람 가능한 범위를 확인한 뒤 목차 한 장을 건넸다. 목록에는 ‘야간 급수반’, ‘임시 배수반’, ‘방수막 설치반’과 함께 낯선 항목이 있었다.
‘아동 보호 동행자, 1인.’
우빈은 강민호를 떠올렸다. 사고 당시 보관 통로에 있던 아이. 그 아이를 데리고 나온 사람이 이정민이라는 증언은 이미 확보했다. 그런데 동행자 기록이 따로 있었다면 구조를 둘러싼 시간표가 또 한 번 달라지는 셈이었다.
“민호 씨에게 물어볼까요?” 소라가 말했다.
“허락을 받고요.” 우빈은 곧바로 대답했다.
강민호에게는 보호 중인 이름과 생활이 있었다. 그가 먼저 연락했을 때에도 공개하지 말라고 했다. 우빈은 직접적인 신원 질문 대신 ‘사고 당시 손목에 붕대를 감은 사람을 기억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담아 안전하게 연락했다.
답장은 한 시간이 지나서 왔다.
‘기억합니다. 하지만 저를 구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종이에 이름을 쓰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했어요.’
우빈은 손에 든 휴대전화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를 돕겠다고 왔다가 이름 하나 때문에 문을 더 잠갔다면, 그것이 바로 지금 금고가 저지르는 일이었다.
답장 아래에 짧은 음성파일이 첨부돼 있었다. 민호는 자기 목소리를 사용해도 된다는 범위와, 외부 공개는 원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분명히 적었다.
‘세 번, 쉬고 두 번. 그 신호가 들리면 반장 아줌마가 응답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한 번은 다른 사람 신호였어요. 그 사람은 밖에서 제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어요. 아직 안에 몇 명 있는지만 물었어요.’
소라는 녹음을 듣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정민 씨가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 구조 인원을 세고 있었던 거군요.”
그날 저녁, 보존센터를 나오던 그들은 건물 앞 벤치에 앉은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 옆에는 플라스틱 우산 두 개와 낡은 천가방이 있었다. 손목을 가린 긴 소매 아래로 하얀 천이 조금 비쳤다.
우빈이 멈춰 서자 여자가 먼저 말했다.
“찾고 있는 사람, 접니다.”
“성함이…”
“기록에는 장은서라고 적혀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걸 그대로 믿지는 마세요.”
여자는 신분증을 꺼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자기가 들고 온 낡은 시간표를 꺼냈다. 종이 한쪽이 물에 젖었다 말랐고, 바깥 면에는 손글씨로 '오해경 반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날 제가 마지막 교대자였어요. 공식 직원은 아니었고, 야간 간병 일을 마치고 현장에 부름받아 갔죠.”
“왜 이제 나타나셨어요?” 소라가 물었다.
여자는 천가방 끈을 놓지 않았다.
“당신들이 멈춘 제1보관관 장부 때문에요. 한동안 더는 출근하라는 편지가 오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어제부터 다시 오기 시작했어요.”
그녀가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98-SM-03 / 마지막 근무자 확인]
[장은서 / 퇴근 시각 미등록]
우빈은 종이 대신 여자의 손을 보았다. 봉투를 건네는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는 먼저 물었다.
“그 시간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게 괜찮으세요? 원치 않으시면 지금은 안 하셔도 됩니다.”
여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 아버지도 그날 그렇게 물어봤으면 좋았겠네요.”
그 말은 비난이었고 동시에 간청처럼 들렸다. 태수는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장은서는 봉투를 다시 자기 가방에 넣었다.
“제가 왜 이름을 두 개 쓰는지부터 이야기할게요. 그걸 알아야 오해경 반장이 왜 출근부에서 지워졌는지 알 수 있으니까.”
제12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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