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는 밥그릇을 들고 일어서다가 그대로 멈췄다.
아들의 휴대전화 화면에 자신의 이름이 떠 있었다. 아내가 먼저 알아보고 식탁 끝에 놓았던 행주를 내려놓았다. 화면에는 낯선 숫자가 초 단위로 줄고 있었다.
[미지급 노동시간 최초 기록자: 정태수]
[정산 개시까지 71:58:43]
“아버지. 이거 아세요?”
태수는 대답 대신 안경을 꺼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하려다가 아무 반응이 없자 우빈에게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이런 말은 처음 본다.”
“노동시간을 기록한 적도 없어요?”
“있지.” 태수는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철공소에서 일하면 시간표는 늘 적어. 어느 작업자가 몇 시에 들어왔고, 누가 먼저 나갔는지. 우리처럼 작은 공장은 도장 하나면 출근이 되고 퇴근도 되는 줄 알던 때였으니까.”
이명숙은 물을 따라오다 멈췄다. “그때 당신, 새벽에 전화 한 통 받고 뛰어나간 날이 있었잖아.”
“여러 번이었지.”
“아니. 그날 말이야. 장화 한 짝이 찢어져서 버린 날.”
태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는 철공소 사고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신이 잠근 문에 관해서는 비교적 정확히 말했다. 빗장이 어디에 있었는지, 왜 닫았는지, 누가 안에 있었는지. 그러나 그날 작업자 명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우빈아. 집에서 결론 내리지 말자. 기록을 보여 줘.”
우빈은 소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라는 이미 박현정과 통화 중이었다. 중앙기록관리원 지하 보존실에서는 봉산 작업의 세 번째 장이 저절로 펼쳐졌다고 했다. 현정이 보내 온 사진에는 숫자가 빼곡했다.
[총 미지급 시간 1,108,231]
[최초 입력일 1998-11-03]
[최종 자동 갱신일 2026-10-26]
날짜가 문제였다. 사람 한 명이 이십팔 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해도 저런 시간은 쌓을 수 없었다. 작업자가 수백 명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최초 장부에는 작업장 하나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삼목 철공소 야간 응급작업반.’
우빈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태수의 손등에 오래된 흰 흉터가 선명했다. 젊은 시절 선반 기계의 날에 베인 자리라고 들었는데, 지금은 그 상처가 언제 생겼는지도 묻고 싶어졌다.
“일단 제가 갈게요.”
“나도 간다.”
“아버지, 밤이에요.”
“밤이라서 가야 해. 그 시간표가 무슨 뜻이었는지는 내가 설명할 수 있으니까.”
소라는 차를 끌고 집 앞에 도착했다. 조수석에는 서강재가, 뒷좌석에는 원본 자료가 담긴 회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우빈은 태수가 차에 오르는 동안 어머니와 잠깐 마주 섰다.
“아버지 때문에 또 무슨 일이 생기면…”
명숙은 아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네 아버지가 한 일을 네가 다 감당할 수는 없어. 그 사람한테도 말할 기회를 줘.”
태수는 차 문을 닫기 전에 집 안을 한 번 더 돌아봤다. 이명숙은 식탁을 치우지 않고 서 있었다. 국이 식어 가는 평범한 저녁을 두고, 그들은 또 오래된 사고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빈은 예전 같으면 어머니의 표정부터 외면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작은 목소리로 '돌아와서 말씀드릴게요' 하고 말했다. 약속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아는 사람처럼, 어머니는 그저 손을 들어 보였다.
차는 비가 막 그친 도로를 달렸다. 태수는 창밖에 비친 가로등을 보며 십 분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재가 기록 사진을 열자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날은 평소 야간조가 아니었어. 비가 많이 왔고 창고로 사람들이 몰렸어. 기계를 끌 수 없어서 남은 사람들이 있었지. 사고 뒤에도 펌프를 돌리고, 통로를 치우고, 사람을 찾았어.”
“그분들이 임금을 못 받으셨습니까?” 소라가 물었다.
“받은 사람도 있었을 거야. 내가 전부 확인한 건 아니니까.”
“그런데 최초 기록자가 아버지라는 건요?”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적은 건 출근시간이 아니라…”
그때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갑자기 검은 화면으로 바뀌었다.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 대신 문장이 떠올랐다.
[근무 확인자의 자발적 승계 요청]
[정태수 / ‘계속 일하겠습니다’]
“내가 이런 말 한 적 없어.” 태수가 말했다.
앞유리 너머로 교차로 신호가 파랗게 바뀌었다. 그러나 검은 화면에는 태수의 음성 파형이 재생되고 있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오래된 테이프처럼 지직거렸다.
‘사람 나올 때까지 문 앞에 있겠습니다.’
우빈은 처음 듣는 아버지의 젊은 목소리에 목이 메었다. 그 말은 분명 그날의 약속 같았다. 그런데 금고는 그 약속을 이십팔 년짜리 무기한 근로계약으로 읽고 있었다.
“멈춰요.” 우빈이 강재에게 말했다. “이 소리를 출근 동의로 인정하면 안 돼요.”
강재가 내비게이션 전원을 껐다. 화면이 꺼진 뒤에도 음성은 잠깐 계속됐다. 마지막에 낮은 여자 목소리가 섞였다.
‘정태수 씨, 시간을 적지 마세요. 사람을 적어요.’
태수가 양손으로 무릎을 움켜쥐었다.
“그 목소리…”
“아는 분이에요?”
“오해경 반장이다. 다들 그 여자를 찾으려고 했는데, 기록에는 아예 없다고 했지.”
차가 관리원 정문에 멈췄을 때, 휴대전화에는 정산까지 71시간 21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태수의 이름 바로 아래 새로운 줄이 생겼다.
[제1 미지급 근로자: 오해경]
[퇴근 처리: 없음]
제12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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