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계좌 이름이 아니었다.
1998년 사고 관련 보상금 명단 가장 아래에 붙어 있던 별도 관리 항목이었다. 약정 금액을 제때 주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연락하고 지급처를 찾아야 할 업무. 그 업무에 드는 비용은 원래 지원 예산의 일부였다. 그러나 2010년 재처리 이후, '기다림'은 누군가에게 수수료를 지급하는 독립 자산처럼 기록되기 시작했다.
우빈은 그 장부의 처음과 마지막을 나란히 펼쳤다.
[1998년 / 기다림: 미지급 사유 추적]
[2010년 / 기다림: 미수령 자산 보관 수익]
단어는 하나였지만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도움을 주기 위한 일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직 남아 있다는 이유로 돈을 버는 사업으로 바꿔 놓았다.
서강재는 공식 회계 자료를 검토한 뒤 새로운 사실을 전했다. 가상계정에서 매일 생긴다고 표시된 수수료 상당액 가운데 일부가 실제 외주 계약 대금의 근거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모든 금액이 지급됐다고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특정 연도에 가상의 실적을 내세워 계약 금액을 키운 흔적은 있었다.
“내역을 보시죠. 수수료 발생 5천만 원, 보관 실적 인정, 차년도 용역비 증액.”
“그럼 피해자가 돈을 못 받은 만큼 이쪽은 일을 잘한 셈이네요.” 소라가 말했다.
“바로 그게 문제예요. 못 찾은 사람 수가 실적이 됐어요.”
현정은 지급 대상자들에게 연락하기 위한 적법한 절차와 자료 정정 요청을 분리했다. 신원이 확인된 사람에게는 서류 정정 방법을 안내하고, 아직 찾지 못한 사람의 이름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이정민도 직접 연락을 받았다. 그는 담당자에게 자신이 받아야 할 보상금의 액수보다, 자기 이름 아래 무슨 결정이 내려졌는지를 먼저 물었다.
“돈도 중요하죠. 하지만 내가 없는 사람 취급받았던 이유부터 알려 주세요.”
담당자는 확인된 사실만 설명했다. 기록이 정정됐다고 해서 바로 현금이 지급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지우지 마세요.”
소라는 어머니의 말을 메모했다. 오랫동안 남이 자기 삶의 결론을 대신 내린 사람의 부탁이었다.
강민호는 별도로 피해자 연락망에 포함될 것인지 결정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행사와 조사에 나서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빈에게 짧은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저는 누군가의 통계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다른 아이들이 받지 못한 몫이 있었다면 그 사실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해요.”
우빈은 그 목소리를 재생한 뒤 파일명을 바꿔 저장하지 않았다. 민호가 허락한 용도로만 자료를 쓰기로 했다. 진실을 밝힌다는 명분으로 다시 사람의 말을 훔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 오후, 중앙기록관리원에서 시범 검증이 열렸다. 원본 00의 비정상 출력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최초 로그와 재처리 로그를 분리한 자료를 대조할 수 있었다. 현정은 우빈 일행이 찾은 근거를 시간순으로 정리했다.
첫째, 지급 보류는 확정된 채무가 아니다.
둘째, 수익자 미확정은 새 수익자를 만드는 허가가 아니다.
셋째, 보존 업무를 맡았다는 이유로 직원이 보상금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결이 보존실의 벽에서 희미하게 나타났다. 그는 스스로 전선을 뻗거나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검증 과정에서는 단지 표시된 문구를 읽었다.
[봉산 작업 / 최초 실행 확인]
[수수료 산정: 보류]
우빈이 숨을 내쉬었다. 처음 기록이 다시 보였다. 그러자 재처리 로그가 자동으로 열리며 마지막 승인을 요구했다.
[오류 정정 시 손실 보전 책임자 지정]
[후보: 박현정 / 정우빈 / 김소라]
현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세 사람에게 선택하게 하지 마세요. 이미 남아 있는 반려 기록과 원본을 검증하세요.”
화면은 몇 초 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비정상적으로 큰 숫자 하나가 나타났다.
[보전 예정 손실: 86,400,000원]
우빈의 입술이 말랐다. 숫자는 예전에 보았던 가족 빚과 닮았다. 거절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그 돈을 받아 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다는 유혹이 또다시 찾아왔다.
소라는 그의 얼굴을 알아봤다.
“우빈 씨. 이 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기억하죠?”
“받지 않은 돈에서요.”
“그럼 누가 갚아야 한다는 주장부터 증명해야 해요.”
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에 나온 액수를 지우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산정 근거 불명'이라는 표시를 남길 방법을 찾았다.
미결이 말했다.
“최초 로그에 이의 신청자가 존재합니다. 원본에 없는 손실 보전 책임자는 자동 생성할 수 없습니다.”
[수수료 산정 결과: 미확정]
[강제 대체 등록: 중지]
숫자가 반짝이더니 천천히 흐려졌다. 미결의 몸이 한층 또렷해졌다. 그러나 그는 웃지 않았다.
“재처리 기능이 정지됐습니다. 실제 계약 대금과 연결된 지급 내역은 별도로 조사해야 합니다.”
“그건 이제 사람들이 할 일이겠죠.” 우빈이 말했다.
밖에서는 노을이 내려앉았다. 소라가 이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잘못된 장부를 멈췄고, 아직 실제 돈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어머니는 짧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정말 기다릴 수 있겠다.”
그때 현정의 컴퓨터 화면에 새로운 신청이 떴다.
[제1보관관 직책 말소 요청 접수]
[요건: 현재 보관관의 신원 확인]
우빈은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아야 할 직책을 없애려면, 또 누군가가 그 직책의 주인이라고 밝혀야 하는 구조였다.
미결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
“아직 마지막 함정이 남아 있습니다.”
제11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