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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14화
PAYLUA ORIGINAL · 제114화

114화. 허수 계좌의 주인

빚을 먹는 금고 · 2,816자

오프라인 책장
계좌번호는 열여섯 자리였다. 서강재는 소라가 보낸 사진을 보고 첫눈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2010년 장부에 찍힌 번호는 당시 은행에서 흔히 쓰던 자리 구성과 달랐다. 앞의 네 자리는 실제 금융기관 코드처럼 보였지만, 뒤의 숫자는 계좌를 식별하기보다 문서를 분류할 때 쓰는 방식이었다. “은행 계좌가 아닐 수도 있겠네요.” 그가 말했다. 우빈은 중앙기록관리원 밖의 작은 분식집에서 서강재와 마주 앉아 있었다. 주방에서 끓는 어묵 냄새가 났다. 정산 장치가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도 사람은 밥을 먹어야 했다. 소라는 현정과 함께 관리원에 남아 증거 목록을 봉인하고 있었다. “그럼 없는 돈을 받은 척한 겁니까?” “그렇게 단정하긴 어려워요. 내부 관리용 가상계정이라면 실제 계좌와 연결됐을 수도 있고요. 다만 이 번호에 직접 송금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강재는 종이에 두 개의 상자를 그렸다. 하나에는 '보관료 발생', 다른 하나에는 '수익 인식'이라고 적었다. “장치가 한 일은 아마 이것부터예요. 돈이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누군가의 장부에 수익으로 적었습니다. 그 수익이 실제 현금이 됐는지는 또 다른 질문이고요.” “없는 돈이면 왜 이렇게 위험하죠?” “없는 돈을 근거로 누군가를 압박할 수 있으니까요. 예산을 짜고, 채권을 팔고, 사람에게 갚으라고 요구할 수 있어요. 종이 위 숫자로 실제 사람을 움직이는 거죠.” 우빈은 창밖을 보았다. 거리의 사람들은 신호등에 맞춰 길을 건넜다. 지난번 환승역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고까지 책임으로 팔았다. 이번에는 한 번도 지급하지 않은 돈에서 이익을 만들고 있었다. 강재가 노트북에 오래된 공공 예산 공개 자료를 띄웠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기록관리 관련 외주 계약을 비교한 표였다. 한 업체의 명칭이 매번 달랐지만 계약 수행 주소는 같았다. [서람보관서비스] [미상기록지원] [제일자산보전] “이름은 바꿨는데 주소가 같은 건가요?” “예. 그렇다고 같은 법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당시 대표자와 실제 대금 지급 자료를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눈에 띄었다. '부재 자산 순환 관리'라는 명목의 계약이었다. 우빈은 그 이름을 소리 내 읽었다. “물건이 없는데 순환한다고요?” “이럴 때 제일 먼저 물어야 하는 건, 무엇을 순환시켰느냐예요.” 우빈이 강재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 어젯밤 보관실에서 발견한 차문수의 출입증 사진이었다. 강재가 얼굴을 가까이했다. “이 번호…” 그는 다른 파일을 열었다. 과거 미상채권관리에서 일할 때 쓰던 회수 직책표였다. 우빈에게 이미 설명한 BJH-06의 표식이 그 안에 있었다. 그보다 위에 자주 흐릿하게 지워진 칸이 하나 있었다. [BJH-00 / 수익 인정] [책임자명: 업무 공백] “BJH-00이 백재헌 본인을 뜻한다고 생각했는데.” 강재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실제론 돈을 받은 걸로 처리하는 승인 권한이었어요. 이름은 매번 달라졌습니다.” 그때 분식집 주인이 물 두 컵을 가져다주었다. 장사를 오래한 중년 여성은 둘이 서류를 펼쳐 놓은 모습을 보고 세무조사를 받는 사람들 같다고 농담했다. 우빈이 웃지 못하자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에요. 전에 누가 카드 매출이 틀렸다며 가게 장부를 다 뒤졌거든요. 숫자가 있으면 다 맞는 줄 알았는데, 숫자도 사람이 입력하더라고요.” 우빈은 계산대 옆의 작은 장부를 보았다. 거기에는 밀린 외상값보다 손님들이 다음에 먹겠다고 예약한 어묵 숫자가 더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약속을 기록하는 것과 이미 돈을 받았다고 쓰는 것은 전혀 다르다. 분식집 주인은 그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때 서류 사진 속 차문수의 출입증 번호와 BJH-00 승인 코드가 같은 여섯 자리로 끝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누군가 죽은 보관관의 번호를 회계 승인 권한에 연결한 것이다. 우빈은 곧바로 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발견한 것이 사실인지, 아직 추정인지 차례로 설명했다. 현정은 기록관리원 소유 자료와 외부 계약 자료를 대조할 수 있도록 정식 질의를 넣겠다고 했다. 통화가 끝나자 분식집의 계산대에서 짤랑 소리가 났다. 손님이 동전을 떨어뜨린 줄 알았다. 하지만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강재의 노트북 화면이 검게 변했다가 낯선 표를 띄웠다. [귀하의 자료 열람으로 미수령 수익이 회수되었습니다] [회수액: 18,000원] [수령인: 서강재] “제가 받은 적 없는 돈입니다.” 강재가 바로 말했다. 그는 노트북을 끄지 않았다. 화면을 기록한 뒤 인터넷 연결을 차단했다. 소라에게 내용을 전송할 때도 별도의 휴대전화로 설명했다. 숫자가 나타난 것과 돈을 실제로 받은 것은 다르다는 원칙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방금까지 말끔하던 테이블 위에 동전 하나가 굴러왔다. 종이로 만든 동전이었다. 앞면에 '지급 완료'라고 쓰여 있었다. 우빈이 동전을 건드리려 하자 강재가 손을 들어 막았다. “받지 마세요. 저런 게 나중에 수령 증거가 될 겁니다.” 동전은 혼자 세 바퀴를 돌고 멈췄다. 뒷면에 새 문장이 나타났다. [수익 인식 성공] [차문수 대리 결재: 유효] 우빈은 분식집 계산대를 바라봤다. 방금까지 돈이 오가지 않았는데도 누군가는 거래가 끝났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럴듯한 숫자와 '완료'라는 글자만으로 현실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강재가 낮게 말했다. “허수 계좌는 돈을 담는 통장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누군가 돈을 받았다고 세상을 속이는 증명서예요.” 우빈의 휴대전화에 현정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2010년 승인 원본을 찾았습니다. 차문수가 퇴직한 뒤에 발급된 문서입니다. 그런데 서명 옆에 지문이 있습니다.’ 그는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가짜 계정 뒤에 실제 손이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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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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