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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1화
PAYLUA ORIGINAL · 제11화

11화. 거울 속 채권자

빚을 먹는 금고 · 3,401자

오프라인 책장
정우빈은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수백 장의 채권 계약서가 겹쳐 만들어진 동공 안쪽에 그의 이름이 떠 있었다. 글씨는 새겨진 것이 아니라 물에 비친 얼굴처럼 흔들렸다. 우빈이 왼쪽으로 한 걸음 움직이자 글씨도 함께 움직였다. [최초 채권자: 정우빈] [채권액: 산정 중] [인수 의사 확인] "대답하지 마요." 소라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우빈은 간신히 입술을 다물었다. 자신을 채권자로 적어 놓고 다시 책임을 떠맡겠느냐고 묻는 것. 그들이 몇 시간 동안 당해 온 수법과 똑같았다. "아버지, 저 글씨 보이세요?" 유리판 너머 정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보는 이름은 진짜 이름이 아니다. 보는 사람의 이름을 빌려 오는 거야. 그걸 소유자라고 믿으면 네가 주인이 되는 거지." "누가 만들었는데요?" 정태수의 입이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유리판 아래에서 검은 잉크가 그의 발목을 덮었다. 금고가 증인의 발언 범위를 제한하고 있었다. [관계 보류 종료 00:00:19] 소라가 나무판을 꺼냈다. 이정민이 딸에게 남긴 목소리가 나무결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러나 판을 금고에 가까이 가져가자 목소리가 느려졌다. 어느 순간 '소라'라는 두 글자조차 분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이것도 안 되는 거예요?" 서강재가 벽면의 숫자를 확인했다.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원본을 열람한 사람이 곧바로 책임을 인수하도록 절차가 연결되어 있어요. 증명보다 동의가 먼저 처리되는 구조입니다." "원래는 반대였겠죠." 우빈은 금고 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얇은 유리판을 고정한 나사 네 개, 나무와 철이 맞닿은 모서리, 기름때가 낀 경첩. 아버지가 만든 물건이라면 어딘가 손때 묻은 방법이 남아 있을 것이다. 벽 쪽에서 종이 손이 한 뼘 자라났다. [00:00:12] "열람과 승계가 왜 같은 버튼이어야 하죠?" 우빈은 누구에게도 답을 요구하지 않고 말했다. 질문이 아니라 자기가 확인한 사실이었다. 망치 끝으로 금고 안쪽 나사 하나를 건드리자 미세한 틈에서 낡은 흰 종이가 나왔다. 종이에는 목수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보는 일은 가지는 일이 아니다.' 아버지의 글씨였다. 공방에서 물건을 맡을 때마다 정태수가 영수증 뒤편에 적던 말이었다. 맡긴 물건을 보여 주는 것과 값을 청구하는 일은 다르다고, 아버지는 어린 우빈에게 수도 없이 설명했다. 우빈은 종이를 소라와 서강재에게 보였다. "이 문장, 세 사람이 읽은 걸로 합시다. 우리 중 누구도 원본을 인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증인 등록이요?" 서강재가 물었다. "그것도 아닙니다. 그냥 지금 여기서 함께 읽었다는 이야기예요." 그는 망치의 나무 손잡이를 유리판에 댔다. 자신이 열두 살 때 낸 흠집이 문장 바로 아래로 비쳤다. 계약서도 서명도 없었다. 다만 세 사람이 같은 사물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 있었다. 금고 안에서 오래된 톱니가 한 번 헛돌았다. [절차 충돌] [원본 공개권: 확인됨] [책임 승계: 확인되지 않음] [분리 심사 요청] "이거예요!" 소라가 외쳤다. 숫자가 멈췄다. 정확히 00:00:07에서였다. 병원 화면 속 이명숙은 벤치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우빈은 그 말의 모양을 알아봤다. 우빈아. 그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살린 것이 아니라 겨우 일곱 초를 붙잡았을 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일곱 초라니. 이게 무슨 구제예요." 우빈은 벽을 주먹으로 치고 싶었다. 한 사람의 출생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의 기억을 뒤져야 했는데, 그렇게 되찾은 시간은 일곱 초에 불과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았다는 사실이 이 기계에서는 동전 하나보다 가볍게 취급됐다. 소라는 아직 손에 쥐고 있던 나무판을 내려다봤다. "일곱 초라도 멈췄잖아요. 멈출 수 있는 기계라면 다시 시작하게 한 사람도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겠죠." 유리판 안쪽의 정태수가 작업대에 앉았다. 그는 마치 평범한 공방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작은 나무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원래 우빈이라면 그 모습을 보고 안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리판 위로는 아버지의 맥박도 체온도 보이지 않았다. 금고가 기억을 흉내 내는 것인지 정말 그 안에 아버지가 갇힌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 제가 그때 정말 잘못한 게 있어요?" "네가 뭘 잘못했는데?" "금고에 계약서를 넣었어요. 엄마 이름이 적혀 있는지도 모르고요. 돈이 없어지는 줄만 알았어요." 정태수는 망치 든 손을 바라봤다. "잘못한 일을 했으면 고쳐야지. 하지만 남이 몰래 붙여 놓은 조건까지 네가 만든 건 아니야. 그 둘을 구별해야 한다. 그걸 구별하지 못하면 또 다른 사람이 대신 갚는다." 우빈은 그 말을 마음에 담았다. 책임을 피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정확히 누구에게 어떤 책임이 있는지 묻지 않으면 선의조차 폭력으로 바뀐다는 뜻이었다. 소라가 다시 유리판을 두드렸다. "정태수 씨. 제 어머니가 어디 있는지만이라도 말씀해 주세요. 우리 엄마는 그날 무엇을 지키려고 했나요?" 정태수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러나 한 글자도 들리지 않았다. 금고 표면에 아주 작은 자물쇠 표시가 나타났다. [원본 증언 범위 제한] [증언 가능 항목: 비문서 관계 증거] 서강재가 자물쇠 표시를 보고 중얼거렸다. "재판에서 증인의 입을 틀어막고, 살아온 기억만 진술하라는 것과 같군요. 기계는 자신을 만든 사람을 가장 두려워하는 모양입니다." 소라는 눈가를 문지르고 고개를 들었다. 슬퍼할 시간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야죠. 이 기계를 만든 사람이 왜 그렇게 했는지." 서강재는 금고 옆에 튀어나온 인쇄구를 가리켰다. 하얀 종이 한 장이 밀려 나왔다. [임시 정지 사유: 채권자 식별 실패] [분리 심사 기한: 일출 전] [심사 장소: 제2정산소 공개 창구] "일출까지라면 얼마 남지 않았죠?" "두 시간 조금 넘었습니다." 그때 커다란 눈에서 우빈의 이름이 지워졌다. 대신 소라의 이름이 떴다가, 서강재의 이름이 떴다. 마지막에는 아무 글씨도 남지 않았다. [최초 채권자: ] 빈칸이었다. "채권자가 없는 거네요." 우빈이 중얼거렸다. 정태수가 유리판을 두드렸다. 아들이 고개를 들자 그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없는 게 아니야. 비어 있는 자리를 누군가 채우고 있는 거지." 금고 뒤쪽의 서류벽이 무너지며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 통로 저편에는 제2정산소의 대합실이 보였다. 열두 사람이 여전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의 손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우빈은 망치를 들었다. 한 사람의 이름이 지워졌다고 끝난 일이 아니었다. 이름이 비어 있는 동안, 저 사람들은 계속 남의 빚을 받게 될 테니까. 대합실을 향해 걷는 그의 뒤에서 금고가 마지막 안내문을 출력했다. [대체 채권자 공모 시작] [후보자: 제2정산소 내 모든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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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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