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가 정산소 유리문에 닿자 소리는 예상보다 작았다.
우빈은 크게 휘둘렀다. 유리가 깨지는 대신 문틀에 박힌 오래된 못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못은 누군가 일부러 안쪽에 숨겨 둔 것처럼 작은 목재 조각을 물고 있었다. 우빈은 못을 집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00 / 원본 보호 봉인]
문이 스르륵 열렸다.
"부숴 버릴 줄 알았는데."
소라가 작게 말했다.
"못 하나만 빼면 되는 문도 있어요."
우빈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하던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건물 내부에는 은행처럼 가지런한 대기석이 있었다. 번호표 발급기에는 사람이 없었고, 벽면 전광판에는 모든 번호가 000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천장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그 음악 아래 작은 종이 소리가 계속 섞였다. 수천 장의 서류가 한꺼번에 접히는 소리였다.
서강재가 앞장섰다. 그는 창구 뒤쪽 검은 통로를 가리켰다.
"정산실은 저기입니다. 원본 금고는 제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지하에 있었어요. 다만 이동됐을 수도 있습니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요?"
"동의하지 않았다면 아직 안전합니다. 제2정산소가 가동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소라는 번호표 발급기를 살폈다. 기계에는 '신청'과 '거절' 버튼이 있었다. 그녀는 작은 포스트잇에 글을 적어 각 버튼 옆에 붙였다.
'동의하기 전에 계약서 원본 확인 요구.'
"이것밖에 못 하나요?"
그녀가 물었다.
"지금은요. 누군가는 왜 여기 왔는지 스스로 물어야 하니까요."
우빈은 대답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안에는 버튼이 없었다. 바닥에는 타원형 금속판이 하나 놓여 있었다.
[대표 보증인 발걸음 감지]
우빈이 발을 빼자 문이 닫히려 했다. 그는 뒤로 물러섰다가 금속판 대신 엘리베이터 문틈에 망치 자루를 끼웠다. 문이 다시 열렸다. 소라가 손전등을 들어 안쪽을 비췄다. 층 표시판 아래 수기로 적힌 점검 표가 있었다.
[지하 3층 / 원본 보관]
"전기가 꺼지면 거기로 떨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소라의 농담에 웃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서강재가 엘리베이터 바깥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표지판을 믿어 보죠."
세 사람은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은 생각보다 길었다. 지하 1층과 2층은 잠겨 있었고, 3층 문 앞에는 작은 목제 명패가 걸려 있었다.
'정태수 공방.'
우빈은 명패를 쓰다듬었다. 나무 표면의 흠집을 아는 손이었다. 아버지는 늘 '정' 자 세로획을 조금 길게 새겼다. 그 습관을 아는 사람이 만든 명패였다.
문을 열자 익숙한 나무 냄새가 났다. 오래된 작업복이 벽에 걸려 있었고, 작업대에는 접다 만 작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 얼마 전에 일하다 잠깐 자리를 비운 곳 같았다.
"아버지……"
우빈의 목소리가 떨렸다. 작업대 위에는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 우빈은 다른 아이들보다 큰 망치를 들고 있었다. 아버지가 뒤에서 두 손을 받쳐 주고 있었다. 사진 한쪽에 어머니가 웃고 있었다.
사라졌던 얼굴들이 온전했다.
서강재는 문을 닫았다. 전등이 켜지고 벽면 서류함에 박힌 이름들이 한꺼번에 빛났다. 이곳에서는 적어도 우빈의 가족이 아직 존재했다.
"어떻게 이런 곳이 남아 있죠?"
소라가 물었다.
"원본 보관실이니까요. 복제품의 기록이 다 바뀌어도, 여기는 최초의 서명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녀는 어머니 이정민의 이름을 찾았다. 서류함 가운데 작은 서랍을 열자 낡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라가 웃는 거 들으면 집에 가고 싶어져.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소라는 서랍 앞에서 숨을 멈췄다. 그녀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에게 남겼던 전화 음성 메시지의 마지막 문장을 기억했다. 바로 그 목소리였다.
"엄마……"
하지만 서랍 안에는 녹음기가 없었다. 얇은 나무판에 글자들이 줄지어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관계 증명 / 이정민 - 김소라]
"우빈 씨가 망치로 가족을 증명했던 것과 같은 원리예요."
서강재가 말했다.
소라는 나무판을 꺼내 가방에 넣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 아주 작은 희망이 보였다.
공방 뒤쪽에 금고가 있었다. 처음 도영식 사무실에서 본 금고와 크기는 같았지만 색이 달랐다. 새까만 철판이 아니라 나무결이 살아 있는 회색 금고였다. 금속 위에 아주 얇게 붙인 나무판이 손끝에 따뜻하게 닿았다.
[00 / 원금]
우빈은 도영식에게 받은 나무 조각을 금고 앞에 가져갔다. 조각이 금고 표면의 작은 홈과 정확히 맞았다. 금고에서 익숙한 목수의 향이 났다. 아버지가 공방에서 쓰던 아마인유 냄새였다.
"열어도 될까요?"
우빈이 물었다.
서강재가 말했다.
"원본은 물건이 아닙니다. 누가 첫 책임을 질 것인지 결정했던 순간이에요. 열면 그 장면을 보게 될 겁니다. 하지만 장부도 당신을 볼 겁니다."
소라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혼자 열지 말아요. 두 사람이 본 걸 나중에 다시 말해 줄 수 있게요."
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함께 금고 앞에 섰다. 나무 조각이 홈에 끼워지자 작은 소리와 함께 철판이 움직였다. 내부에는 현금이나 계약서가 없었다. 대신 빛이 나오는 얇은 유리판이 있었다.
유리판 위로 낡은 작업장 풍경이 펼쳐졌다. 젊은 정태수가 서 있었다. 옆에는 도기철과 이정민이 있었다. 셋이 보고 있는 것은 첫 번째 금고였다.
"완성했네."
도기철이 말했다. 그의 눈은 흥분에 젖어 있었다.
이정민이 고개를 저었다.
"우린 채무를 없애는 방법을 찾은 게 아니에요. 억울하게 떠넘겨진 빚을 최초 책임자에게 되돌리는 방법을 찾았죠."
"그게 무슨 차이야?"
"진짜 빚진 사람을 찾아야 해요.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마음대로 새 빚을 씌우면 안 됩니다."
젊은 정태수가 두 사람 사이에 섰다.
"일단 멈춰. 검증부터 해야 돼."
그러나 도기철은 이미 금고에 서류를 넣고 있었다. 누군가의 대출 보증 계약서였다. 금고 안에서 검은 글자가 솟아올랐다.
[최초 책임자 식별 실패]
[원본 보증인을 지정하십시오]
도기철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대로 작동을 안 하잖아. 임시 책임자를 올려야 움직이나 봐."
이정민이 그를 막았다.
"없는 책임자를 만들 수는 없어요. 기계를 멈추세요."
그 순간 정태수가 앞으로 나섰다. 금고 위에 손바닥을 올리고 말했다.
"내 이름을 올려. 내가 직접 책임질 테니까. 대신 조건을 걸자. 다른 누구에게도 이 책임을 옮기지 않는다. 내가 끝까지 확인한다."
이정민이 소리쳤다.
"태수 씨, 그건 안 돼요! 책임이 뭔지도 모르잖아요!"
정태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만들었으니 우리가 바로잡아야지."
기계가 그의 말을 받아 적었다.
[원본 보증인: 정태수]
[책임 범위: 최초 책임자 확인 시까지]
[제3자 임의 이전 금지]
이정민은 다른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 종이에는 세 사람의 서명 칸이 있었다. 그녀는 문장을 추가했다.
[원본 공개 요구권은 피해자에게 있다]
[개인 관계 및 생명을 담보로 삼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도기철에게 펜을 건넸다.
"이걸 지킬 자신이 없으면 서명하지 마세요."
도기철은 한참 망설이다 펜을 들었다. 그러나 서명하기 직전, 종이를 뒤집었다.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누군가 작은 글씨를 덧붙였다.
[예외: 원본 보증인의 직계 혈족이 동의하는 경우]
정태수는 그 문장을 보지 못했다.
영상이 흔들렸다. 우빈은 자신의 숨소리를 들었다. 아버지가 그날 책임을 맡은 이유는 가족을 해치려던 것이 아니라, 아무도 빚을 덮어쓰지 않게 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선의를 이용할 틈을 도기철이 만들어 놓았다.
"이제 왜 우리를 찾았는지 알겠어요."
우빈이 말했다.
서강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계 혈족. 당신을 원본 보증인으로 올리면 모든 복제품을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제가 동의하지 않으면요?"
금고가 대답했다.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했다.
"원본 보증인 복귀가 불가능하므로 예외 조항이 활성화됩니다. 기존 채권자의 요청에 따라 책임을 분산합니다."
우빈은 이를 악물었다. 분산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시 전체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 자신의 집 앞에 온 괴물, 어머니 손등의 직인. 모두 누군가에게 넘어가는 빚이었다.
"아버지를 돌려보내 주세요. 본인한테 직접 물을 겁니다."
금고 안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우빈아."
그는 굳어 버렸다. 아버지였다. 누가 따라 해도 그 특유의 낮고 조심스러운 억양까지는 만들기 어려웠다.
"아버지?"
"너는 절대로 서명하지 마라."
"어디 계세요? 나와 보세요. 엄마도 기다려요."
금고의 유리판이 어두워졌다. 정태수의 얼굴이 잠깐 비쳤다.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이 먼지투성이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네가 내 이름을 불렀다고 해서 내가 진짜인지 어떻게 알겠니."
우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태수는 아들이 들고 있는 망치를 가리켰다.
"열두 살 때 네가 못을 잘못 박았지. 그날 내가 망치 손잡이에 남긴 흠집, 왜 안 지웠는지 기억하니?"
"다시 쓸 수 있으니까."
"그래. 망가진 걸 숨기지 말고 고쳐야 하니까."
우빈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버지……"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잘못 박았구나."
정태수가 손을 내밀었다. 유리판 표면을 통과할 수 없는 손이었다.
그때 소라가 비명을 삼켰다. 그녀가 보고 있던 어머니의 나무판에 글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가족 관계 보류 종료 00:00:30]
동시에 지상 대합실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울렸다. 금고 윗면의 숫자가 00에서 01로 변하기 시작했다.
[제2정산소 일괄 정산 개시]
[대표 보증인 정우빈]
[승인 여부: 미확인]
우빈은 망치를 힘껏 움켜쥐었다. 아버지를 꺼내야 했다. 어머니의 기억도 지켜야 했다. 그리고 문밖의 이름 모를 사람들을 또 다른 빚의 희생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금고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우빈 씨. 정태수의 원본 책임을 승계하시겠습니까?"
그가 대답하기 전에 망치 손잡이에 오래된 흠집 아래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숨겨진 조항 발견]
[원본 책임 승계 외의 제3선택권]
[행사 조건: 최초 채권자의 실명 확인]
우빈은 그 문장을 읽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까지 모든 서류에는 채무자와 보증인 이름만 있었다. 돈을 빌려줬다는 사람, 최초 채권자. 그 이름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유리판 안쪽에서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말했다.
"우빈아. 그 이름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금고 뒤편의 벽이 조금씩 갈라졌다. 벽이 아니라 수백 장의 채권 계약서였다. 종이 사이로 커다란 눈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최초 채권자 / 실명 열람 요청]
그리고 우빈은 그 눈의 동공 안에 새겨진 글씨를 보았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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