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숙은 혼자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침에 한인규에게 먼저 연락했다. 자신이 1998년에 쓴 메모의 원본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인규는 단독 방문을 만류했고, 두 사람은 시민지원센터 상담실에서 만났다. 그 뒤 현장의 옛 물품 접수 창구에서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우빈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어머니는 창구 앞에 서 있었다.
“엄마, 왜 전화도 안 갖고 갔어요?”
우빈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날카롭게 묻어 있었다.
이명숙이 당황한 얼굴로 아들을 보았다.
“충전해 놓고 나왔어. 그리고 인규 씨랑 왔잖아.”
“그래도 연락을 하셨어야죠.”
“그래. 그건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내 이름이 도용된 일을 네가 다 처리해 주는 건 싫었어.”
우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위험하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어머니를 또 다른 빈칸 속에 가둬 두는 말일지도 몰랐다. 그는 대신 물었다.
“지금 뭐 확인하고 계세요?”
한인규가 창구 위의 안내문을 가리켰다.
[장기 미수령 물품의 권리 환급 접수]
[권리 환급 후 기존 연결 내역 일괄 종료]
안내문 아래에는 서류를 제출할 수 있는 투명 상자가 있었다. 서식을 보니 '본인의 의사로 기존 일체의 수령 기록을 인정하고 환급받음'이라는 문장이 작게 들어 있었다.
“환급받는 게 아니라 인정하는 거네요.” 소라가 말했다.
이명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직 안 냈어.”
창구 안쪽에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정장에 잘 다린 셔츠를 입은 남자였다. 얼굴은 평범했지만 목소리가 이상하게 일정했다.
“문서 확인을 위해 간단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누구죠?” 우빈이 물었다.
“임시 환급 담당자입니다.”
“소속 회사는요?”
“수익자관리실의 업무를 승계한 부서입니다.”
남자는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회사 이름이 없고 직책만 적혀 있었다.
[제1보관관 대행]
우빈은 명함을 받지 않았다.
“당신들이 만든 규정 때문에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걸 '환급'이라는 말로 덮으려는 겁니까?”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누가 피해를 입혔는지 조사받는 것보다 빠르겠죠.” 소라가 차갑게 말했다.
남자는 웃었다.
“조사는 오래 걸립니다. 저희는 지금 당장 316명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벽에는 작은 모니터가 여러 개 켜졌다. 첫 번째에는 학교급식실에서 일하던 여성의 이름이, 두 번째에는 택배기사의 이름이 떠 있었다. 세 번째 모니터에는 편의점 앞에서 우빈에게 화를 냈던 자영업자의 사진이 있었다. 우빈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이 자료가 실제 현재 상태를 보여 주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사람들 모두 해제할 수 있다고요?” 우빈이 물었다.
“단 한 사람의 신청이면 가능합니다.” 대행이 말했다.
“당신이 제시한 서류에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는 증거가 없어요.”
대행은 화면을 두드렸다.
“고객이 원하는 것은 증명이 아니라 안심입니다.”
소라가 앞으로 나섰다.
“고객이라는 단어 쓰지 마세요. 사람을 고른다고 했죠? 저 사람들은 당신 서비스에 가입한 적도 없어요.”
모니터가 일제히 지직거렸다. 화면 속 이름표들에 붉은 테두리가 생겼다. 우빈은 대행이 말하는 '해제'가 정말 다른 사람의 자유를 돌려주는 것인지, 아니면 더 큰 계약 아래 묶는 것인지 알아낼 방법을 찾고 있었다.
한인규가 수첩을 펼쳐 들었다.
“1998년에도 이랬습니다. 시간을 주지 않았어요. 빨리 찍으라고 했죠. 늦으면 아이들이 위험해진다고.”
대행이 처음으로 한인규를 쳐다봤다.
“당시 귀하의 날인 거부로 절차가 지연되었습니다.”
“지연된 절차가 원래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을 수도 있죠.”
그 말과 함께 창구의 기계음이 높아졌다. 우빈은 이것이 설득이 아니라 압박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느꼈다. 모니터에 사람들의 얼굴을 띄워 놓은 이유는 구하려는 마음을 이용해 누군가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명숙 쪽으로 서류를 밀었다. 종이에는 손글씨처럼 자연스러운 서명이 이미 절반쯤 적혀 있었다. 어머니 이름의 마지막 획만 비어 있었다.
“한 획이면 끝납니다.”
이명숙이 종이를 내려다봤다. 주변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서랍에서 검은 영수증들이 솟아올라 창구 가장자리를 덮었다. 이름 없는 손들이 서명의 마지막 획을 대신 그리려 했다.
“나는 아까 분명히 말했어요.” 어머니가 낮게 말했다. “이 글씨는 내 것이 아니라고.”
“물품을 보관하셨죠.”
“그랬어요.”
“그러니 책임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물건을 보관한 것과 남의 권리를 가져온 건 다른 일이에요.”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들의 안전보다 그 구분이 중요합니까?”
어머니의 손이 멈췄다. 우빈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서류를 대신 밀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명숙은 먼저 아들을 향해 손바닥을 들었다. 잠깐 기다려 달라는 뜻이었다.
“우리 아들은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모르는 일까지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정작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안 보고 지나가겠지.”
그녀가 남자를 똑바로 보았다.
“우리 아들은 책임을 피하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자기 잘못 아닌 것을 남에게 넘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거예요. 나는 그 아이를 믿을 거예요.”
남자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창구 유리가 검게 변하더니 길게 갈라졌다.
[가족 대리 인정: 실패]
[현장 이의 신청자: 이명숙]
그때 남자 뒤편에 또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처음엔 단순한 그림자인 줄 알았는데, 그림자는 벽에 기대 앉은 사람의 형태를 갖췄다. 검은 장갑을 낀 팔이 보였다.
“정산 시간이 다가옵니다.” 그림자가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행 권한을 유지하겠습니다.”
“실패한 대행은 물품으로 반환됩니다.”
남자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생겼다. 우빈은 그때 알아차렸다. 이 환급 담당자 역시 한때 사람이었거나, 적어도 누군가의 빈자리를 대신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였다. 실패한 뒤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당신도 이름이 있습니까?” 우빈이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술을 움직였다.
“기억이…”
그 순간 벽시계의 초침이 빨라졌다. 종이 서랍이 열리며 파란 이름표가 허공으로 쏟아져 나왔다. 한인규가 이명숙을 데리고 출입문 쪽으로 물러났다. 소라는 직원에게 비상 출입 경로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결이 창구 앞에서 선을 그었다.
“이의 신청은 수령이 아닙니다. 보호 요청을 또 다른 채무로 전환할 수 없습니다.”
서류들이 한 차례 크게 들썩이다가 바닥에 흩어졌다. 남자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우빈을 보았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의 이름을 찾으세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정우빈이라는 이름은 최초 수익자의 이름이 아닙니다. 최초 수익자가 남긴 빈자리를 가리키는 표식입니다.”
창구는 완전히 닫혔다. 마지막으로 남은 안내문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정산 시작까지 00:17:00]
제10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