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호는 어른이 된 뒤에도 비 오는 날의 냄새를 구별했다.
빗물이 콘크리트 지하실에 고였을 때 나는 눅눅한 냄새와, 오래된 종이가 젖어 검게 변할 때 나는 냄새는 달랐다. 그는 그 차이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한 적이 없었다. 설명하면 그날의 복도가 다시 눈앞에 펼쳐질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우빈을 불렀다.
“옛 수첩에 나오는 물품 반납이요. 제가 본 장면 같아요.”
복지관 상담실에 도착한 민호는 입구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소라가 원하면 오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민호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선택해서 온 거예요.”
그는 따뜻한 물 한 잔을 받은 뒤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비가 내리던 오후, 잠긴 문 틈에서 본 것은 구조대원의 발만이 아니었다. 누군가 바퀴 달린 수레를 밀고 있었다. 수레 위에는 젖은 담요와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에는 두 겹의 종이가 붙어 있었다.
“맨 위에는 '반납'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런데 그 밑에는…”
“뭐라고 적혔는데요?” 우빈이 물었다.
“아직도 정확하지 않아요. 글자는 생각나요. '처리 완료.' 그런데 그게 그날 적힌 글씨인지, 나중에 본 기록이 섞인 건지 모르겠어요.”
현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구분해 주시면 돼요. 기억에 확신이 없다고 해서 가치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민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가장 중요한 장면을 설명했다. 문 밖에 서 있던 남자가 수레를 밀던 사람에게 물었다고 했다.
'누구 이름으로 처리하지?'
수레를 밀던 사람은 답했다.
'아직 아무도 없어요.'
그러자 남자는 조금 짜증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중에 채워.'
“그 사람이 누군지 기억합니까?”
민호는 고개를 저었다.
“얼굴은 못 봤어요. 손만 봤죠. 새까만 장갑이었어요.”
우빈은 76화에서 본 회수자의 장갑을 떠올렸지만 단정하지 않았다. 검은 장갑을 낀 사람이 모두 같은 사람일 수는 없었다. 그는 민호의 말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도록 현정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날 오후, 성인 나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민호가 증언하러 왔다는 사실을 듣고 그녀도 자신의 기억을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소라는 허락을 구한 뒤 민호에게 전달했다.
민호가 천천히 읽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무섭다고 울던 아이의 목소리야. 누가 수레를 밀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누군가 문 앞에서 종이를 찢는 소리를 들었어.'
민호는 눈가를 훔쳤다.
“그 아이는 나였을지도 몰라요.”
우빈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오래전 두 아이가 같은 문을 바라봤다는 사실과, 그들이 기억하는 것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모두 중요했다.
민호는 손끝으로 물컵을 돌렸다. 유리컵 아래 생긴 물자국을 보더니 마른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러고도 손을 떼지 못했다. 우빈은 그 행동이 지하실 기억과 관계가 있는지 묻지 않았다. 지금 그의 말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자리에 편안히 머물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다.
“다시 문 앞에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며칠 못 잤어요.” 민호가 말했다.
“가지 않으셔도 돼요.”
“알아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그곳에만 남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잠깐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로 이름을 여러 번 바꿨습니다. 누군가 알아볼까 봐서요. 하지만 바꾸고 싶지 않은 기억도 있어요. 누가 문틈으로 물병을 밀어 줬거든요. 그 사람은 누군지도 모릅니다.”
우빈은 정해원에게서 시작된 보호 요청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사람을 도운 기록이 반드시 채권자의 권리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도움을 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마음과 돈을 갚아야 한다는 의무 사이에는 아주 긴 거리가 있었다. 금고는 그 거리를 종이 한 장으로 지워 버리려 했다.
소라는 민호가 동의한 부분을 별도로 정리했다. 정확한 날짜가 기억나지 않는 장면에는 날짜를 쓰지 않았다. 목소리만 기억나는 사람의 얼굴을 그림으로 대신 만들지도 않았다. 민호는 그 빈칸들을 보며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이렇게 비워 둬도 되나요?”
“기억나지 않는 건 비워 두는 게 맞죠.” 소라가 대답했다.
그 말에 민호가 아주 작게 웃었다. 이 사건에서 처음으로 빈칸이 두려움이 아니라 정직함의 표시가 된 순간이었다.
잠시 뒤 미결이 벽에 나타났다. 그는 두 증언을 종이 위에 쓰는 대신, 공중에 흰 선을 그었다. 선은 두 곳에서 시작해 같은 지점에 이르렀다.
“겹치는 구간이 있습니다. 물품 이동과 종이 훼손.”
“그걸로 누군가를 범인으로 정할 수 있어?” 우빈이 물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료를 찾을 위치를 좁힐 수 있습니다.”
미결이 가리킨 것은 1998년 임시 물품창고의 북쪽 벽이었다. 사고 당시 설치됐다가 두 달 뒤 철거된 분리벽. 지난번 창고에서 발견한 도형이 바로 그 벽 뒤를 향하고 있었다.
“증거가 거기 있었다가 이동한 거군요.”
“가능성이 높습니다.”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함께 갈게요.”
소라는 그를 바라봤다.
“위험할 수 있어요.”
“알아요. 하지만 밖에서 기다리는 건 그날로 충분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복지관의 벽시계가 멈췄다. 바늘은 오후 세 시 십칠 분을 가리켰다. 실제 시각은 오전 열한 시였다.
[원본 00 / 증인 접근 차단]
미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종이 벽이 방문을 덮기 시작했다. 창문에서 검은 영수증들이 날아들더니 바닥에 원을 그렸다. 원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유모차 하나가 나타났다.
유모차 안에서는 아기 울음이 들렸다.
민호가 비틀거리자 우빈이 다가갔다.
“저걸 보지 마세요. 과거가 아니라 장치가 보여 주는 거예요.”
민호는 눈을 감았다 뜨고 말했다.
“알아요. 그때 그 안에는 아이가 없었어요. 내가 본 건 빈 유모차예요.”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종이 벽에는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증인 반응 불일치]
[기억 보정 요청]
민호가 주먹을 쥐었다.
“내 기억을 네가 고치지 마.”
그가 그 말을 끝내자 종이 벽이 찢어진 듯 갈라졌다. 그러나 유모차는 사라지지 않았다. 바퀴 아래에서 작은 카드가 한 장 떨어졌다.
[물품 반환 장소 변경]
[지하 2층 → 지상 1층 / 폐기 전산실]
우빈은 그 카드를 바라봤다. 미결이 말했다.
“장치가 기억을 조작하려다 원래의 이동 로그를 노출했습니다.”
소라가 휴대전화로 시간을 기록했다. 정산 시각까지 네 시간도 남지 않았다. 이제 물품창고가 아니라 그 옆 폐기 전산실을 확인해야 했다.
제107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