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이 시작되기 전까지 스물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우빈은 숫자를 세지 않기로 했다. 기한이 짧을수록 사람은 생각 대신 서명을 하게 된다. 그는 소라와 현정이 마련한 작은 회의실에 앉아 전날 찍은 사진을 차례로 펼쳤다.
첫째, 1998년 미배부 물품에 붙은 빈 수령인 칸.
둘째, 2010년에 뒤늦게 기입된 우빈의 이름.
셋째, 이명숙의 서명을 흉내 낸 봉투.
넷째, 후손 연결 대기 316명이라는 숫자.
“우리가 확인한 건 여기까지예요.” 우빈이 말했다. “316명이 실제로 연결돼 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 위험해질 수 있어요.”
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단을 무작정 공개하면 오히려 피해가 생겨요. 저 사람들 이름 자체가 회수 단서가 될 수 있으니까.”
소라는 지역 시민지원센터와 상담기관에 연락했다. 직접적인 도움을 요청할 창구를 확보하는 것이 먼저였다. 금고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서류의 출처와 개인정보 오용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누구도 비밀 회의에 모여 '모두를 대표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점심 무렵, 첫 번째 연락이 왔다.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일한다는 여성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우편물을 받았다고 했다. 봉투 안에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봉사단에 참여한 기록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28년 전 보관된 담요를 아직 인수하지 않았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제가 담요를 가져간 적이 없는데요.” 여성이 말했다.
“그 사실부터 기록해 주세요.” 소라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문서의 발신자도 확인하기 전에는 요구하는 행동을 하지 마세요.”
두 번째 연락은 택배기사에게서 왔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대리 수령을 완료하면 선지원금이 지급된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이름이 적힌 링크를 눌러 보려는 순간 우빈이 통화에 합류했다.
“지금 꼭 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오늘까지 안 하면 지원이 사라진대요.”
“그 조건이 누구 약속인지 모르잖아요.”
남자는 잠깐 숨을 고르더니 링크를 누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소라는 필요하면 공적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정보를 알려 주었다.
세 번째 상담 요청은 편의점 앞에서 일어났다. 자영업자인 남자가 우빈에게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 주며 소리쳤다.
“그럼 이번에 준다는 보조금을 포기하란 말이냐고요! 당신들은 다 가진 사람들이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우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남자의 가게는 지난달 수도관 공사 때문에 매출이 크게 줄었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 당장 현금이 필요했다. 거짓된 수령 절차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우빈의 말이 그에게는 생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충고처럼 들렸을 것이다.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빈이 어렵게 말했다. “진짜 지원금인지부터 확인하자는 거예요. 그다음에 받을 수 있는 건 받으셔야죠.”
남자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확인하는 동안 돈은 누가 대 줍니까?”
그 질문에 우빈은 입을 다물었다. 답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 괴로웠다. 소라가 남자에게 지역 지원 창구와 긴급 상담 방법을 설명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남자는 휴대전화의 수상한 링크를 누르는 대신 종이에 전화번호를 적었다.
가게를 나서자 우빈이 말했다.
“내가 말만 하면 될 줄 알았어요.”
“저분은 오늘 저녁 돈이 필요해요.” 소라가 말했다. “우리는 그걸 없던 일처럼 할 수 없죠.”
“그럼 어떻게 해요?”
“금고를 막는 일과 실제 어려움을 돕는 일을 같이 해야죠. 어느 한쪽만 보면 금고가 또 이겨요.”
그 말은 우빈에게 오래 남았다. 그가 서명하지 않는 법은 배웠지만, 피해자의 삶을 대신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는 아직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오후 한동안 전화가 끊겼다. 우빈은 오히려 더 불안했다. 금고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척하게 만드는 데 능숙했다. 아무 연락이 없다는 사실이 안전을 뜻하지는 않았다.
“우빈 씨, 식사 좀 해요.” 소라가 김밥을 밀어 주었다.
“입맛이 없어요.”
“그러다 당신이 쓰러지면 판단하는 사람이 하나 줄어요.”
우빈은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김밥은 차가웠다. 생각해 보니 오늘 아침 어머니가 밥을 차려 줬는데도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남의 이름이 서류에 올라가는 것을 막으려다 자기 몸에 관해서는 아무 선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저녁에 한인규가 찾아왔다. 그는 낡은 수첩 한 권을 가져왔다. 수첩에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지만, 우빈 앞에 펼친 페이지에는 이름 대신 숫자와 물품 수량만 적혀 있었다.
“그때 받은 물품 숫자예요. 이름표 스무 개, 담요 열두 장, 분유 네 통. 그중 실제로 인계된 물건은 따로 확인했어요.”
“그럼 미배부 물품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계산하면 몇 개 안 돼요. 나머지는 폐기하거나 반환됐습니다.”
소라가 한 페이지를 짚었다.
“반환 표시가 있는데 수령 기록이 없어요.”
“맞아요. 물건이 돌아갔는데 누가 돌려받았는지 칸이 비어 있어요. 누군가 그 빈칸을 계속 붙잡고 있었던 거죠.”
우빈은 소름이 돋았다. 수령하지 않은 채무자는 만들어 내면서 반환받지 않은 수익자는 지워 둔 것이다. 돌려받은 사람을 밝혀야 허위 채권의 시작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우빈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찍힌 것은 낡은 장부였다. 한쪽에는 반납 물품의 개수, 다른 한쪽에는 작은 사각형 도장이 있었다.
[수익자관리실 / 반환품 접수]
[반환 인수자: 공란]
사진을 보낸 사람은 짧게 적었다.
'반환 창구를 찾지 마시오. 그 자리는 비어 있어야 합니다.'
우빈이 답장을 쓰려는 순간 또 다른 문자가 왔다.
'빈칸을 채우면 누군가를 살릴 수 있습니다. 그 사람 이름을 적을 용기가 있습니까?'
우빈은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우리에게 원하는 건 증거가 아니에요.”
“그럼요?” 소라가 물었다.
“누구든 한 명을 골라 책임자로 만들게 하는 거예요.”
창문 바깥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빈은 낮에 걸려 온 상담 전화를 다시 떠올렸다. 사람들은 누구도 남의 채무를 갚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이름을 함부로 쓰지 말아 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자정이 되자 금고 내부에 새로운 기록이 떠올랐다.
[정산 대상 확대: 316명]
[후손 연결의 집행 시각: 15:17]
[대체 방안: 1명의 자발적 일괄 수령]
우빈은 마지막 문장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세상이 어수선할 때 영웅 한 명이 나타나 모든 것을 떠안아 주길 바라는 이야기. 이 금고는 그 서사를 누구보다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배웠다. 한 사람의 영웅이 되는 것은 때때로 315명을 다시 침묵하게 만드는 길이었다.
제10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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