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빈이 집에 도착했을 때 이명숙은 우편봉투를 열지 않은 채 식탁에 올려 두고 있었다.
봉투는 두꺼웠다. 발신자 주소도 우편 소인도 없었다. 받는 사람 정우빈, 수령 대리인 이명숙. 이름 옆에는 이명숙의 서명을 흉내 낸 글씨가 있었다. 획 끝이 이상하게 날카로웠다.
“이거 내 글씨 아니야.” 어머니가 말했다.
“확실해요?”
“네가 어릴 때 학교에 내던 서류도 내가 직접 썼어. 내 이름을 내가 몰라보겠니.”
우빈이 봉투를 촬영했다. 소라와 현정에게 사진을 보낸 뒤, 어머니에게 봉투를 어디서 발견했는지 물었다.
“우편함 안에 놓여 있었어. 손으로 받은 건 아니고. 네 이름이 써 있어서 가져왔지.”
어머니는 잠깐 말을 멈췄다.
“우빈아,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니지?”
금고의 방식을 아는 우빈은 즉시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잘못이 없다고 가볍게 단정하면 어머니가 궁금해하는 실제 일까지 가려질까 두려웠다.
“서명을 안 하셨다는 건 분명해요. 봉투를 가져오신 건 사실이고요. 그 둘은 따로 봐야 해요.”
이명숙이 아들을 바라봤다.
“네가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네.”
그 말에 우빈은 시선을 내렸다. 가족을 지킨답시고 처음 금고에 계약서를 넣었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날은 누가 피해를 입는지 묻지 않았다. 이제 와서 신중해진 것이 늦은 건지, 그때부터 배운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소라가 집에 도착했다. 현정은 봉투의 출처와 전달 경로에 대해 필요한 기록을 남기도록 안내했다. 당장 뜯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지만, 무서워서 모든 판단을 금고에 맡길 수도 없었다.
“열 건지 결정하실 분은 어머니예요.” 소라가 말했다. “어머니 이름이 도용됐으니까요. 저희가 옆에 있겠습니다.”
이명숙은 물 한 잔을 마신 뒤 말했다.
“열어 볼게요. 다만 내가 받았다고 인정하는 건 아니야.”
그녀는 가위로 봉투의 오른쪽 끝만 잘랐다. 안에는 얇은 종이 세 장이 들어 있었다. 첫 장은 1998년 임시 지원시설의 물품 목록이었다. 담요 열두 장, 분유 네 통, 아기용 이름표 스무 개. 둘째 장은 빈칸이 많은 인계 확인서였다. 마지막 장에 이명숙이 직접 써 놓았다는 '보관 물품 확인' 메모가 붙어 있었다.
“이 메모는 내 글씨가 맞아.” 그녀가 말했다.
우빈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럼 정말…”
“잠깐.” 이명숙이 그의 말을 끊었다. “내가 이걸 쓴 건 기억나. 담요 상자와 이름표 묶음이 남아 있다고 적었어. 누가 가져가는지는 모르니까 인수인은 비워 두었고.”
그녀는 메모 맨 끝을 가리켰다.
[확인사항: 미배부 물품 보관 / 인계 미완료]
바로 아래에는 다른 잉크로 문장이 더해져 있었다.
[미배부 물품 관련 장래 수령인 권리 일괄 승계]
“이건 내 글씨 아니야.”
우빈은 종이 사이에 낀 옅은 먹지 자국을 보았다. 아래쪽 문장만 압력이 달랐다. 누군가 원본에 없던 말을 덧붙였다는 사실을 육안으로도 의심할 수 있었다.
이명숙은 자신의 메모를 두 손으로 잡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마른 종이 냄새가 작은 방에 퍼졌다. 오래전 물품창고에 남은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바닥에 물이 얼마나 찼는지는 이제 생생히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젖은 담요를 힘껏 짜던 손의 감각만 남아 있었다. 아이를 안을 사람이 부족해서 사람들은 서로 일을 맡았다. 누군가는 분유를 찾고 누군가는 젖은 신발을 말렸다. 그것은 빚을 만들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그날 나보다 어린 여자애가 있었어.” 이명숙이 말했다. “짐을 내리다 발을 다쳐서 주저앉았는데, 내가 그 애 짐을 대신 들었지. 어떤 물건인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
“그 짐에 이름표가 있었나요?” 우빈이 물었다.
“그건 모르겠다. 빈 상자였을 수도 있고. 내가 직접 본 건 담요하고 포장용 종이뿐이야.”
소라가 조용히 말했다.
“기억이 안 나는 것까지 억지로 채우지 않으셔도 돼요.”
이명숙이 울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에게 도움이 되려고 말을 하다 보면 모르는 것도 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금고는 바로 그 조급함을 파고들었다.
식탁 가장자리에서 태수가 낮게 입을 열었다.
“나도 문을 잠근 다음 구조가 끝났는지 확인하지 않았어. 그건 내가 기록에 남기고 책임질 일이다. 하지만 그날 여기에 없던 우리 아들이 무슨 잘못을 했겠어.”
우빈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서로를 위로하려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잊자는 말로 도망치지 않는 태도가, 지금은 가장 필요한 용기처럼 느껴졌다.
그때 봉투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세 장뿐이던 종이 사이에서 네 번째 장이 밀려 나왔다.
[기초 수령권 관리 번호: 00-1998-0617]
[원수익자: 미상]
[대리 연결 기준: 접촉자의 직계 후손]
“후손이라…” 이명숙이 씁쓸하게 말했다. “물품을 정리한 사람 자식한테 그 물건을 맡기겠다는 소리니?”
“그보다 더한 거예요.” 우빈이 대답했다. “물건을 맡기는 척하면서 나중에 생긴 빚까지 보내는 거죠.”
우빈의 방에서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집 안 작은 금고가 저절로 문을 여닫고 있었다. 방바닥 틈으로 검은 종이들이 밀려 나와 거실을 향했다. 문틈마다 '인계 대기'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이명숙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식탁 위에 놓인 봉투에서 자신의 메모를 꺼내 들었다.
“내가 적은 건 이것뿐이야. 여기 있는 담요를 다 나눠 주기 전까지 창고에 두자는 말이었어. 누군가의 이름을 대신 올리라는 뜻이 아니었어.”
거실 문틈의 검은 글자가 잠깐 흔들렸다. 우빈은 어머니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겁이 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겁이 나도 자기 말을 스스로 하는 중이었다.
소라가 곁에 섰다.
“그 말씀을 따로 기록해 두겠습니다. 다만 추가된 문장이 누가 쓴 것인지 확인되기 전에는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이명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가 옳다고 믿는 말도 확인받을게요.”
종이 괴물은 현관 앞에서 한 번 형태를 갖췄다가 무너졌다. 검은 종이들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각각의 종이에는 서로 다른 사람 이름이 있었다. 오래전 봉사단 명단에 오른 사람들, 그 자녀들, 그리고 태어나지도 않은 손자들.
우빈은 가장 가까운 한 장을 읽었다.
[미배부 지원 물품 / 후손 연결 대기: 316명]
그는 종이를 건드리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한 사람의 서명을 흉내 내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이 장치는 한 세대가 잠깐 맡았던 물건을 다음 세대의 빚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때 미결이 방문 앞에 나타났다. 평소보다 얼굴이 더 희미했다.
“원본 00이 새로운 정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언제?” 우빈이 물었다.
“내일 오후 세 시 십칠 분. 1998년 기록에 표시된 시각입니다.”
어머니가 사진을 내려다봤다.
“그 시간이 왜 중요하니?”
미결은 잠시 입술을 닫았다가 대답했다.
“그때 처음으로, 아무도 받지 않은 것을 누군가 받았다고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제10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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