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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02화
PAYLUA ORIGINAL · 제102화

102화. 비어 있는 두 시간

빚을 먹는 금고 · 3,289자

오프라인 책장
박현정은 잠들지 못한 채 보존실의 형광등을 켜 두고 있었다. 원본 08의 카세트테이프는 투명한 보관함 안에 들어 있었다. 테이프를 녹음한 사람의 목소리를 다시 들으면 무언가 더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현정은 같은 자료를 무작정 재생하지 않았다. 테이프의 구간별 물리 상태와 보존 과정부터 기록했다. 중요한 증거일수록 서두르는 사람이 망가뜨리기 쉬웠다. 새벽 다섯 시, 우빈과 소라가 도착했다. 우빈은 눈 아래가 시커멨다. “어머니까지 연결하려고 해요.” “금고가요?” 현정이 물었다. “1998년에 방문한 봉사 기록을 찾아낸 것 같아요.” 소라가 의자를 당겼다. “정확하게는 금고가 그 방문을 알고 있다는 거죠. 그 사람이 채무를 받았다는 뜻은 아니고요.” 현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정리한 연표를 보여 주었다. 14시 07분. 최초 구조 요청 접수. 14시 19분. 현장 출입문 폐쇄 확인. 16시 11분. 공식 구조 종료 보고. 그 사이 일부 녹음의 시간 표시가 끊겨 있었다. 복구 불가라는 글자가 적힌 부분은 약 두 시간이었지만, 현정은 그것을 '두 시간 동안 아무 기록도 없다'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 기록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해원 씨 목소리 뒤에 남자 목소리가 있었어요.” 소라가 말했다. “책임자가 누구냐고 물었죠.” “원본을 더 훼손하지 않고 비교할 수 있는 현장 접수 기록을 찾았어요.” 현정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다만 열람 허가가 나와서 확인한 건 이 목록뿐이에요.” 종이 끝에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임시 보호물품 인계 예정 / 수령 담당자 미지정] “그런데 이 목록 아래에 기묘한 표시가 있어요.” 현정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목록의 오른쪽 끝에 둥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붉은 도장이 찍혔다가 지워진 모양이었다. 우빈은 그 모양을 알아봤다. 자신의 금고 바닥에 새겨져 있던 자국과 같았다. “수령을 확인하기도 전에 찍은 도장 같네요.” “가능한 가설이에요. 도장이 언제 찍혔는지는 따져야 해요.” 현정이 말을 끝내자 보존실 안쪽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새로 출력한 적 없는 종이가 프린터에서 조금씩 밀려 나오고 있었다. 프린터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 우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라가 손목을 붙잡았다. “가까이 가지 마요.”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은 잉크가 반듯한 표를 이루었다. [미확인 수령인 대체 후보 1: 정우빈] [대체 후보 2: 이명숙] [대체 후보 3: 강민호] [후보 수락 시 누락 시간 해제] “해제라는 단어를 쓰는 거 보니 우리가 원하는 걸 알고 있어요.” 우빈이 이를 악물었다. “후보 중 하나가 수락해야 한다는 근거가 없습니다.” 문가에 미결이 서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얼굴 윤곽이 또렷했다. 대신 왼손 끝이 조금씩 종이 가루로 떨어졌다. “괜찮아요?” 우빈이 물었다. “저는 원래 청구를 수행하는 절차였습니다. 그 절차에 반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일관성이 손상됩니다.” “쉽게 말해 아픈 거군요.” 미결이 그를 보았다. “그 표현은 정확하지 않지만, 버리지 않겠습니다.” 프린터에서 두 번째 장이 나왔다. 이번에는 1998년 현장의 평면도였다. 지하 출입문과 물품창고 사이에 작은 통로가 표시돼 있었다. 현정은 그것이 당시 도면과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때 소라가 지도 한쪽을 짚었다. “이쪽 화살표… 출입 방향이 반대예요. 사람을 꺼내는 통로가 아니라 물건을 빼내는 통로처럼 그려져 있어요.” 우빈이 소라를 보았다. “사고 중에 누군가 물건을 옮겼다는 거예요?” “그렇게 보이지만, 지금은 질문만 할 수 있어요.” 현정은 의자에 등을 기대지 못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자신이 잘못 읽은 자료가 몇 건인지 스스로 셀 수 없었다. 과거의 장부에서는 날짜 옆에 찍힌 도장이 진위의 근거였지만, 이 사건에서는 그 도장이 다른 문서를 오염시키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료 자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의심되는 부분과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을 구분하면, 적어도 누가 언제 거짓말을 시작했는지는 드러날 수 있었다. “이 테이프를 다시 재생하면 두 시간의 목소리가 돌아올까요?” 우빈이 물었다.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어요. 소실된 기록은 없었다는 뜻이 아니고, 다른 기록의 진짜 여부까지 보증해 주지도 않죠.” 소라는 기록실 유리창 너머 쌓인 서류 상자들을 바라봤다. 한 번 쓰인 잘못된 이름 하나가 다른 기록에 복사되고, 또 그 사본을 근거로 새로운 결론이 내려지는 구조. 그들은 금고에서만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서류를 다루는 사람의 성급함과도 싸우고 있었다. 현정은 조사용 책상 위에 투명한 필름을 깔고 사건 시간을 적었다. 파란 펜은 확인된 자료, 회색 펜은 증언, 붉은 펜은 금고가 단독으로 주장한 내용이었다. 우빈은 종이 위에 색이 세 가지나 있다는 사실이 의외로 든든했다. 지금까지 금고는 언제나 한 가지 색, 하나의 결론으로 모든 사람을 몰아갔기 때문이다. “1998년 6월 날짜 옆에 2010년 수정 이력이 있으면요?” 우빈이 물었다. “그건 후대의 사람이 뭘 했다는 단서죠. 1998년에 그 일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우빈은 자신의 이름표가 원래 사건의 유물이 아닐 가능성을 처음으로 똑바로 생각했다. 그 순간 두려움의 방향이 바뀌었다. 죽은 사람이 쓴 예언보다 살아 있는 사람이 남긴 조작이 더 끔찍할 수도 있었다. 현정은 공인 자료 목록에서 예전 시설 설계 변경 이력을 찾아냈다. 1998년 5월, 임시 창고 분리벽 설치. 1998년 7월, 벽체 원상 복구. 두 항목의 승인 담당자 이름은 가려져 있었다. “사고 전에 벽을 세웠고 사고 뒤에 없앴어요.” 우빈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어머니였다. “우빈아, 창고에 남아 있는 사진을 찾았어. 봉사단이 그곳에 갔을 때 찍은 거야.” “사람도 나와요?” “아니, 벽뿐이야. 그런데 이상해. 사진 뒷면에 누가 시간을 적어 놨어.” “몇 시인데요?” “오후 세 시 십칠 분.” 현정이 굳어 버렸다. 그 시간은 공식 기록의 공백 한가운데였다. “무엇이 찍혀 있어요?” 우빈이 물었다. 어머니는 잠깐 말이 없었다. “닫힌 문 앞에 빈 유모차 하나.” 미결이 고개를 돌렸다. “그 유모차의 수령인이라면, 계약과 무관한 보호 요청입니다. 그러나 원본 00은 보호 요청을 재산으로 등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프린터가 마지막으로 짧게 움직였다. [수익자 권리 발생 위치: 임시 물품창고] 우빈은 그 문장을 읽으며 깨달았다. 누락된 두 시간은 누가 빚을 갚았는지의 기록이 아니라, 누가 남의 물건을 제 것으로 만들었는지의 기록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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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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