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은이 받은 것은 익명 우편이 아니라 정식 진술 요청서였다.
보낸 사람은 오지안. 서람초 수문 사고 당시 열한 살, 현재 서른한 살의 여성이었다. 신원 확인 서류는 봉인돼 있었고, 조사 담당자 외에는 열람을 금지해 달라는 요청이 명시돼 있었다.
신청서에 적힌 문장은 간단했다.
'나는 숫자 밖에 서 있던 사람입니다. 내 실명은 공개하지 않고도 현장 중단 신호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현우는 그 이름을 모르는 채로 스무 해를 살았다. 그런데 서류에 적힌 글씨를 보는 순간 이상한 친근함이 느껴졌다. 네모난 글자 사이에서 조금 비뚤게 올라가는 받침. 어린 시절 자신의 공책에 누군가 써 두었던 '내일 봐'와 닮아 있었다.
“직접 만나나요?”
가은은 신청서의 선택란을 보였다.
“지안 씨가 대면 조사를 요청했어요. 현우 씨에게는 아직 참석 허락이 없습니다. 우선 저와 주영 씨가 만나기로 했습니다.”
현우는 서운했지만 그 감정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나서야 겨우 얻은 선택권이었다.
***
지안은 작은 도서관의 별도 열람실에서 가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검은 점퍼 소매를 단정히 접어 올리고, 책상 위에 낡은 종이봉투를 놓아 두었다. 봉투에는 파란색 끈 한 가닥이 들어 있었다.
“운동화 끈입니다.” 지안이 말했다. “신발은 가져가지 않았어요. 사고 뒤 누군가 제 신발을 맡아 주겠다고 했죠. 한 짝은 자료 창고에, 한 짝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갔어요.”
가은이 물었다.
“문자로 '다른 한 짝은 그 사람이 신고 있었다'고 보내신 분입니까?”
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렇게 적었어요. 당시 현장에서 봤습니다. 여자 어른이 제 운동화를 자기 발에 억지로 끼워 신었어요. 신발이 작아서 뒤꿈치는 밖으로 나왔고요.”
“왜 그랬다고 생각합니까?”
“그때는 나를 놀리는 줄 알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물에 젖은 바닥에 작은 발자국을 남기려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의도는 확실하지 않아요.”
가은은 진술을 그대로 기록했다. 추정은 추정으로 남겼다. 미연이 말했던 '진흙이 없던 신발'이 지안의 말과 연결될 수도 있었다.
지안이 봉투에서 작은 필름 사진을 꺼냈다. 잘린 얼굴이 있던 사진의 다른 인화본이었다. 세 아이의 얼굴이 모두 남아 있었다. 현우, 세아, 그리고 지안.
“이건 제가 보관했어요. 얼굴을 잘라 낸 사진과는 별개로요. 그때도 얼굴이 없는 사진만 세상에 남으면 언젠가 내가 있었다는 사실까지 의심받을 것 같았거든요.”
“이 사진은 저희 쪽에서 신원을 확인하는 데만 쓰겠습니다.”
“네. 인터넷에 올리지는 말아 주세요.”
***
가은이 목격 사실을 묻기 전, 지안은 컵을 잡아 손을 녹였다. 조사실에는 에어컨 소리가 작게 울렸다.
“왜 지금 연락하셨습니까?”
지안은 창밖을 보았다.
“저는 다른 도시에서 살았어요. 직장도 생겼고 가족도 생겼죠. 그런데 최근 인터넷에서 그때 기록이 다시 퍼지는 걸 봤어요. 이름이 없는 아이가 없는 아이처럼 설명돼 있더군요.”
“직접 찾아와서 바꾸고 싶으셨군요.”
“아뇨. 처음에는 그냥 모른 척하려고 했어요. 스무 해 동안 그렇게 살아온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다 최미연 씨 기록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본 어른인데, 그분의 목소리까지 없어지면 정말 아무도 남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가은은 서류 위에 '자발적 진술'이라고 적었다. 지안이 말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그 이유대로 중요했다.
지안의 진술은 두 번의 두드림에 관해 중요한 구분을 남겼다. 그녀는 배수구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 대신 밸브를 잠근 직후 경고음이 두 번 울리는 것을 들었다. 그 순간 대피소 문 안에서는 아이가 한 번 철판을 두드렸다. 서로 다른 세 소리가 한 파일에 기록된 것이었다.
“그러면 대피소 안의 아이가 도와 달라고 한 뒤 밖에서 경보가 울린 거군요.” 가은이 말했다.
“순서는 비슷해요. 그런데 밖에 있던 어떤 어른이 '세 번이면 격리 완료'라고 말했어요. 제가 안 된다고 했어요. 두 번은 배수를 멈추라는 신호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어른의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지안은 고개를 저었다.
“모자와 마스크를 썼어요. 대신 신발을 기억해요. 제 운동화를 신고 있던 그 여자였어요.”
가은은 잠시 말을 멈췄다. 지안은 봉투 맨 아래에서 작은 종잇조각을 꺼냈다. 금속판에서 떨어져 나온 경고문 일부였다.
'차수 중단—인원 재확인 전 재개 금지.'
그녀는 손톱으로 종이 가장자리를 눌렀다.
“그 사람은 제가 이걸 읽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 이름이 없다고, 제가 무슨 말을 해도 기록할 수 없다고 했죠.”
“그래서 숫자 밖에 서 있었다는 말을 쓰신 거군요.”
“네. 출입 목록에 없더라도 제 눈이 없었던 건 아니잖아요.”
***
조사를 마치고 지안은 현우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알려도 좋다고 했다. 다만 사진은 당분간 보여 주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가은은 그 의사를 전했다.
현우는 긴 답장 대신 한 줄을 보냈다.
'말해 줘서 고마워. 나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은 모른다고 할게.'
지안의 회신은 바로 오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 기록관의 자동 발행기에서 낯선 문서가 인쇄됐다.
[현장 중단 이력 정정 요구]
[신청인: 오지안]
[상태: 증인 부적격 / 원본 목록 미등재]
주영이 서류를 붙들었다. 지안은 공식 진술 절차를 밟고 있었는데도 시스템은 그녀를 증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서류 맨 아래의 처리 예정 시간은 다음 날 자정이었다.
가은은 접수 번호를 확인했다.
“이건 자동 반려예요. 그런데 누가 자동 반려 규칙 자체를 만들었는지 나와 있지 않아요.”
현우가 물었다.
“그럼 우리가 가진 종이 원본이 있어도 못 막는 겁니까?”
“종이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자동 판정을 다시 심사할 사람은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 화면의 작은 상태 표시가 바뀌었다.
[이의 신청 접수 창구: 운영팀 02]
주영은 천천히 노트북을 닫았다. 이의를 신청해야 하는 기관과 잘못된 판정을 내리는 기관이 같았다.
제9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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