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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94화
PAYLUA ORIGINAL · 제94화

94화. 숫자 밖에 선 사람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2,832자

오프라인 책장
도면 가장자리의 별표는 아이가 그린 것처럼 삐뚤었다. 현우는 별표 밑의 '숫자 밖에 선 사람'이라는 문장을 다시 읽었다. 목록에는 발을 놓을 위치 아홉 개가 표시돼 있었다. 별표는 그 표시들에서 두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좁은 점검구 앞, 사람이 몸을 옆으로 틀어야 겨우 설 수 있는 자리였다. “열 번째 사람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죠?” 현우가 물었다. 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리에 사람이 있었다는 뜻인지, 작업 도구를 둔 곳인지 아직 몰라요. 숫자는 한 번 붙이면 쉽게 사람의 신분이 돼 버립니다.” 그들은 별표를 확대 촬영하고 도면 원본의 잉크층을 확인하기로 했다. 복도 바닥에 오래된 별표가 남아 있는지도 살폈지만, 그 자리에는 새로 덧씌운 시멘트만 있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정문 옆에 은색 승합차가 서 있었다. 차 안에 누가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가은이 차 번호를 기록하는 동안 운전석 문이 열렸다. 중년 남자가 내렸다. “시설 정비 회사에서 왔습니다. 이번 주 안으로 내부 마감재를 제거해야 해서요.” 가은은 그에게 출입 허가서를 요구했다. 남자는 휴대전화로 작업 지시를 보여 줬다. 정비 일정은 맞았다. 그러나 세부 항목의 '점검구 주변 마감재 일괄 폐기' 부분이 새벽에 추가돼 있었다. “증거 보존 조치가 내려진 구역입니다. 추가 공정은 담당 기관에 다시 확인하세요.” 남자는 난처하게 웃었다. “우리는 날짜만 통보받았어요. 누가 바꿨는지는 모릅니다.” 그가 차에 올라탄 뒤 서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날도 저런 식이었어요. 담당하는 사람은 바뀌었는데 작업을 취소할 권한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 서림의 옛 수첩에서 현장 책임자의 이름을 찾은 것은 태경이었다. 수첩 맨 뒤 사인란에 서명 하나가 있었고, 뒤늦게 추가한 전화번호가 있었다. '최미연, 야간 구조 보조'. 당시 스물한 살의 임시 근로자였으며 지금은 동해 쪽에서 작은 열쇠 수리점을 운영한다고 했다. 가은은 연락하기 전에 주소가 현재에도 유효한지 확인했다. 서림이 먼저 전화를 걸었다. 오래 끊겼던 인연이라 답장이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현우는 옆에서 수첩을 닫았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회신이 왔다. 최미연은 대면이 아닌 영상 통화만 가능하다고 했다. 화면에 나타난 여자는 회색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있었다. 배경에는 열쇠를 깎는 기계가 놓여 있었다. “그 사건을 지금도 조사합니까?” “원본 기록이 전산화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구분이 사라졌습니다.” 가은이 말했다. “당시 직접 보신 사실만 확인하고 싶습니다.” 미연은 한참 침묵하다 손에 쥐었던 육각 렌치를 내려놓았다. “아이 두 명이 있었어요. 대피소에 갇힌 애 말고도, 배수구 옆에 한 명 더 있었어요. 나는 처음에 둘 다 안에 있는 줄 알았지.” 현우의 손끝이 저렸다. “그 아이가 밸브를 움직였습니까?” “모릅니다. 제가 본 건 젖은 운동화와 떨리는 손이에요. 차수판 손잡이를 잡고 있었고, 옆에서는 어른 목소리가 소리쳤어요. '손대면 안 된다'고.” “그 어른 얼굴은 보셨나요?” “뒤통수만. 그리고 그 사람 신발에는 진흙이 하나도 없었어요. 비가 그렇게 왔는데.” 미연은 책상 밑에서 납작한 쇠조각을 꺼냈다. 녹슨 금속판 한쪽에 붉은 페인트가 붙어 있었다. “이걸 떼어 보관했어요. 아이가 손잡이를 잡으려다 베일까 봐.” 그녀는 판을 카메라 가까이 가져왔다. 판 위에 손으로 쓴 문장이 보였다. '두 번 울리면 차수 중단. 인원 재확인.' 가은은 곧바로 읽었다. “두 번은 격리 승인이 아니라 중단 신호였군요.” 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분명히 그렇게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작업을 멈추라고 했죠. 그런데 누군가 무전으로 말했어요. 세 번의 신호가 확인됐으니 다음 절차로 넘어가라고.” *** 미연은 잠시 화면 밖을 보았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화면 옆으로 완성된 열쇠 한 개가 놓였다. “예전에 어떤 손님이 그랬어요. 오래된 자물쇠는 부수면 쉽지만, 살리려면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가은이 대답했다. “그날의 장치를 오늘 그대로 사용할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왜 잠겼는지는 알아야겠네요.” “맞아요. 저는 스무 해 동안 그 쇠조각을 숨기고 살았어요. 제가 잘못했을까 봐요. 그런데 다시 보니 글자가 그대로 남아 있더군요. 내가 그때 뭘 들었든 이 글씨는 있잖아요.” 현우는 그녀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미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고맙다는 말은 받지 않을게요. 제가 본 것 중에는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것도 있어요. 그래도 없는 일로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통화가 끝나기 직전 미연은 현우를 불렀다. “혹시 당신이 그때 밖에 서 있던 아이예요?” 현우는 바로 그렇다고 하지 못했다. “저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 직접 봤는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럼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날 나는 당신에게 집에 가라고 했을지도 몰라요. 어른들이 알아서 할 거라고.”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말할게요. 나는 그날 아이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못했어요.” 현우는 통화를 마친 뒤 한동안 화면을 보았다. 누구의 기억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확실히 모른다고 인정하는 어른의 목소리는 오래 남았다. 밤 열한 시, 미연이 금속판을 기록관으로 보내겠다고 연락했다. 그때 화면 하단에 첨부된 운송 신청서의 물품 명칭이 갑자기 바뀌었다. '차수 중단 표지판'이었던 칸이 '사고 현장 폐기 대상'으로 바뀌었다. 미연은 얼굴을 굳혔다. “이상하네요. 저는 그런 내용을 적지 않았는데.” 현우가 영상을 확대하는 순간 미연의 머리 위로 희미한 붉은 글씨가 보였다. 최미연. [기록 소멸 예정 71:5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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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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