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은의 손에 남은 것은 온기가 아니라 종이 한 장이었다.
현우가 들고 있던 대기 종료 신청서였다. 종이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걸려 있었고, 바로 앞에는 사람이 서 있었던 흔적 같은 빈 공간이 있었다. 가은은 그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현우 씨.”
대답이 없었다.
곁의 태경이 그녀를 붙잡았다.
“누굴 부르세요?”
그 순간 가은은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태경의 표정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현우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주영도 화면에서 '09'라는 문자열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가은은 자신의 수첩을 펼쳤다. 조금 전까지 적어 둔 현우의 이름이 공란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이름 옆에 쓰인 문장은 남았다.
'이 사람이 지금 이곳에 있었음을 직접 확인함.'
가은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잊히는 것과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에 겹쳤다. 그러나 종이 위의 자신이 적은 행위까지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지금 하려던 일을 끝내야 해요.”
***
가은은 열람 기록을 다시 읽었다. 보호 요청서, 생존 확인서, 대기 종료 신청서. 세 문서의 날짜와 시각을 서로 대조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대기 종료 신청서의 현우 서명 칸은 비어 있었지만, 그 아래 압력으로 눌린 종이 결은 남아 있었다. 누군가 펜을 쥐고 직접 적었다는 흔적이었다.
“서명 이름은 없어졌어요. 하지만 신청자가 직접 있었다는 물리적 흔적은 남았습니다.”
서림이 조용히 말했다. “저는 기억이 나요. 아니, 지금은 이름이 아니라 모습이 기억납니다. 여기서 그렇게 쓰고 있었어요.”
세아가 빨간 장갑을 손에 끼었다. 노란 실 매듭이 오래된 피부처럼 손목에 닿았다.
“저도 봤어요. 그 애가 아니어도, 바로 여기 있던 사람이 직접 끝내겠다고 했어요.”
가은은 그들의 말을 별도 진술서로 받았다. 사람들의 기억은 흐려졌지만, 오늘 각자 확인한 행위가 있었다. 주영은 봉인된 송신 장비의 마지막 작업 로그를 확인했다.
[접수 신청: 직접 입력]
[기록 주소: 00 상담실]
[작성자 참조: 소멸]
[원본 서명 흔적: 보존]
“원본 서명이 사라진 게 아닙니다.” 주영이 말했다. “전산에 연결되는 이름 참조만 끊긴 거예요. 저 종이 자체는 원래의 서명 행위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는 봉인 서고의 수동 대조 장치를 다시 연결했다. 원본 요청서와 생존 확인서를 대조하고, 현대의 전산명 대신 실제 문서의 봉인 일치 여부를 확인했다.
***
잠시 뒤 은곡방송국 화면에 가짜 09가 나타났다.
'대기본 유지. 보호 우선.'
가은은 화면을 보며 말했다.
“당신은 누군가의 요청을 대신할 권한이 없어요. 처음 요청한 사람은 이 문서를 통해 보호받아야 했지, 영원히 대기해야 했던 게 아닙니다.”
가짜 09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영은 수동 대조 결과를 송신했다. 남아 있는 봉인 두 개가 일치했고, 당시의 생존 확인 시각도 일치했다. 무엇보다 대기 사유가 끝났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문 안의 아이가 그날 실제로 구조됐다는 기록이었다. 그 이후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이 절차에서 요구하지 않았다.
송신 장치가 낮게 떨렸다.
[대기 사유 해소 확인]
[대기자 보호 유지 사유 소멸]
[대체 참조 자동 생성 중지]
은곡방송국 화면 속 남자는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 속 존재가 사람의 의식인지, 02가 만든 응답 기록인지 아직 확정할 수 없었다. 그에게 거짓된 위로를 건넬 이유도, 새로운 이름을 붙일 이유도 없었다.
잠시 뒤 화면이 꺼졌다.
관제소의 붉은 경고등도 하나씩 사라졌다.
***
정적은 오래 지속됐다.
서림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벽을 붙들었다. 가은은 무심코 빈자리를 다시 봤다. 방금 전까지 거기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구였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람.” 태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가 찾던 사람이 있었잖아요.”
가은은 눈을 감았다. 목소리, 얼굴, 이름. 하나씩 끊어지던 것들이 모두 먼 곳으로 밀려 가는 듯했다.
그때 탁자 위의 종이배가 움직였다.
바람이 없었다. 종이배는 아주 조금 기울더니 접힌 면이 스르르 펼쳐졌다. 안쪽에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기다릴게.'
그 문장 끝에 새로운 글씨가 천천히 나타났다.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돼.'
가은은 그 문장을 읽자 손끝이 저릿해졌다. 원본 문서에 적혀 있던 부탁은 한 아이가 영원히 사라지겠다는 맹세가 아니었다. 누군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끝났고, 끝난 약속을 계속 붙잡을 이유는 없었다.
탁자 맞은편에서 의자가 삐걱거렸다.
그곳에 현우가 앉아 있었다.
그는 무릎에 두 손을 얹고 한동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눈은 충혈돼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가은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현우 씨.”
그가 고개를 들었다.
“저… 조금 전에 어디 갔었죠?”
가은은 즉시 그를 안아 주는 대신 손부터 내밀었다. 이번에는 현우의 손이 분명히 닿았다. 차갑고 무거운, 살아 있는 사람의 손이었다.
“어디에 있었는지는 아직 몰라요.” 가은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돌아왔어요.”
***
현우가 돌아온 뒤에도 전부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편의점 직원은 그의 얼굴을 봐도 단골이었는지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도서관 예약 기록의 이름 칸도 비어 있었다. 기록관 직원들은 별도 복원 신청을 통해 빠진 출입 내역을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새로운 공란은 늘어나지 않았다. 현우의 눈앞에서도 자신의 이름은 붉게 빛나지 않았다.
나경은 취재 노트를 펼쳐 새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사라졌다 돌아온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한 사람을 찾아낸 영웅담도 아니었다.
그녀는 이 제목을 골랐다.
'보호라는 명령이 사람을 지울 때.'
기사 첫 문단에는 00 상담실의 원래 보호 요청과 그것이 전산화 과정에서 바뀐 사실을 적었다. 서람초 아이들의 신원은 쓰지 않았다. 기록을 복원하는 데 필요한 것과 사람의 사생활을 밝히는 것을 구분하려고 했다.
하린은 현우가 집에 돌아왔을 때 울지 않았다. 그 대신 종이배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오빠, 이제 문 앞에서 기다릴 필요 없지?”
현우는 종이배를 손가락으로 눌러 평평하게 펴 놓았다.
“응. 오늘은 집에서 자도 돼.”
하린은 잠시 미소 지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같이 밥 먹자.”
“그러자.”
그날 밤 현우는 오래간만에 불을 끄고 누웠다.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밤에는 늘 문이 있었다. 안에서 누가 두드릴지 몰라 잠들지 못하는 문. 이제 그는 문을 닫는 것이 사람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벽 세 시 십이 분, 그의 휴대전화에 익명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09의 대기를 종료한 사람에게.'
'고마워. 이제 드디어 내 차례가 왔어.'
그 아래에는 주소도 전화번호도 없었다.
단 하나의 문장만 있었다.
'나는 그날 문 안에서 두 번 두드렸던 아이가 아니야.'
현우는 화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동안 자신이 들었던 첫 번째 신호는 문 안쪽에서 왔다. 그러나 그다음의 두 번은 바깥에서, 다른 사람이 보냈을 수도 있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스무 해 전 그 문 앞에는 대체 몇 사람이 있었던 걸까.
제9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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