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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88화
PAYLUA ORIGINAL · 제88화

88화. 00 상담실의 마지막 양식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2,857자

오프라인 책장
소멸 예정 시각까지 열여덟 시간. 현우는 보건지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자기 이름을 여러 번 속으로 불렀다. 이현우. 이현우. 세 번째부터는 발음이 낯설어졌다. 오래 불러 보지 않은 다른 사람의 이름 같았다. 가은이 운전대를 잡고 말했다. “지금 제 얼굴 알아보죠?” “알아요.” “제 이름도요?” “윤가은.” “그럼 다음 질문. 제가 아까 뭐라고 했죠?” 현우는 망설였다. 방금 전의 문장은 기억나지 않았다. 가은은 답을 기다리며 차 속도를 늦췄다. “한 문장씩 잊는 건지, 연결이 끊어지는 건지 확인하려고요. 틀려도 됩니다.” 현우는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실종자를 찾을 때, 그들은 살아 있으면서도 자기 이야기를 잃곤 했다. 이제 그가 그 안에 들어와 있었다. “실수해도 된다고 했어요. 비슷한 말이었죠?” “거의 맞아요.” 가은은 손등의 작은 상처를 만졌다. 현우가 며칠 전 서류 더미에 손을 베었을 때 소독약을 건네준 자리였다. 그녀는 이 상처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조용히 확인했다. *** 00 상담실에는 서림과 주영, 세아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세아는 비상용 아날로그 복사기를 끌어 왔고, 주영은 낡은 출력 양식을 세 장 나란히 놓았다. '대기 종료 확인서.' 양식은 의외로 단순했다. 대기를 시작한 사람, 대기 사유, 사유가 해소됐음을 확인한 자료. 그러나 마지막 칸에는 굵은 글씨가 있었다. '확인을 요청받은 사람의 신원을 공개할 필요는 없음.' 현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자신이 필사적으로 지키려던 원칙이 이미 스무 해 전 문서 속에 적혀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알아야 할 권리까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걸 쓰면 끝납니까?” 태경이 물었다. 주영은 고개를 저었다. “작성만으로 끝나는 건 아닙니다. 원래 절차는 확인서를 서로 다른 기관 두 곳에 보관하게 했어요. 한쪽 기록이 훼손돼도 사실이 남도록요.” 가은이 벽에 붙은 보관 경로 지도를 봤다. 한쪽은 보건지소의 현장 보관함, 다른 한쪽은 수문 관제소의 봉인 서고였다. 전산망과 무관한 기계적 보관 경로였다. “서고 쪽은 지금 접근 가능해요?” 주영은 얼굴을 찌푸렸다. “수문 점검 때문에 오늘 밤 잠깐 열립니다. 다만 관제소 쪽 원본 열쇠가 사라졌습니다.” 세아가 가방에서 빨간 장갑을 꺼냈다. “열쇠 얘기라면,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어.” 장갑 손목의 노란 실을 풀자 작은 금속판이 떨어졌다. 양쪽에 숫자 0이 새겨진 열쇠표였다. “서림 선생님이 옛날에 이걸 장갑에 묶어 줬어. 잃어버리지 말라고.” 서림이 그 표를 보자 표정이 굳었다. “열쇠는 아니지만, 열쇠 보관함 번호예요. 수문 관제소의 00번 보관함.” *** 그때 보건지소 출입문에 누군가가 세 번 노크했다. 가은이 관리인에게 연락을 받았다. 검은 우산을 든 남자가 또 왔다고 했다. 그는 이제 정식으로 자신의 이름과 법인 소속을 밝혔지만, 시설에 들어올 권한을 제시하지 못했다. 가은은 그에게 밖에서 면담하겠다고 했다. 남자는 유리문 너머로 현우를 바라봤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현우를 제대로 알아봤다. “이현우 씨죠?” 현우가 대답했다. “어제는 절 모르셨잖아요.” “사실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이어폰에서 기억하지 말라는 소리가 나왔어요.” 남자의 손이 떨렸다. 그는 귀에 꽂힌 장치를 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방송국 안전 점검 계약을 받았어요. 누군가 09번 대기자가 이곳을 벗어나면 위험하다고 했죠. 저도 그게 사람을 보호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가은은 신분을 확인하고 진술을 기록했다. 남자는 자신이 맡았던 역할이 시설 밖 출입 감시뿐이었다고 말했다. 기록을 바꾸는 권한은 없었고, 현우와 마주쳤던 순간 기억이 순간적으로 흐려졌다고. “누가 시켰습니까?” 남자는 휴대전화의 계약 승인 알림을 보여 주었다. 승인란에는 '02 운영팀'이라는 문자와 접수 번호만 있었다. “사람 이름은 못 봤어요. 다만 계약서에 낯선 문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화면을 넘겼다. [대기 해제 완료 시 09 보존본 폐기] 현우가 읽었다. 그러자 남자의 화면이 한 번 깜빡였다. 문장이 '보존본 폐기'에서 '보호 완료'로 바뀌었다. 가은은 두 화면을 모두 사진으로 남겼다. “보존본을 폐기하는 게 보호 완료라면, 02는 끝내 현우 씨가 없었던 사람이라고 만들 겁니다.” *** 수문 관제소는 밤 열한 시에 열렸다. 가은은 증거 봉인과 입회를 맡길 사람을 확보했고, 주영은 신청서 두 장을 작성했다. 현우는 마지막 문장 앞에서 펜을 멈췄다. '대기 사유 해소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존재를 대신 증명하기 위해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그 문장을 썼다. 쓰는 동안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붉은 숫자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원본 접수증을 붙이고 나니 오래된 문서의 한쪽에서 아주 얇은 붉은 줄이 드러났다. 선 끝에 적힌 것은 한 문장이었다. '원본 요청자가 아닌 대리 신청은 무효.' 주영이 말을 잃었다. “02가 만든 가짜 09가 먼저 신청해도, 원래 종이에 남은 요청자의 필체와 맞지 않으면 효력이 없어야 해요.” 서림은 현우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서는 기억의 흐림이 조금 가셨다. “그날 네가 썼던 것과 지금 네가 쓰는 글씨는 달라. 하지만 종이를 접을 때 꼭 같은 자리에 손을 올려놓는구나.” 현우는 펜을 내려놓았다.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이 이름 하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이제 여러 번 확인했다. 방 밖에서 전화가 울렸다. 수문 관제소 관리인이었다. “00번 보관함을 열려는데, 누가 이미 안에서 잠금장치를 걸었습니다.” 현우의 이름 위로 붉은 숫자가 떠올랐다.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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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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