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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87화
PAYLUA ORIGINAL · 제87화

87화. 문밖에서 기다리는 사람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2,927자

오프라인 책장
은곡방송국 앞에는 오래된 송신탑이 서 있었다.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계단과 창틀이 젖어 있었다. 건물 안에서 켜진 유일한 불빛은 2층 제어실이었다. 가은은 정식 시설 관리자의 안내를 받아 출입문을 열었다. 현우는 차에서 내려 건물을 보자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지금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제어실 모니터에는 현우의 얼굴이 있었다. '대기 종료 신청자 확인 완료.' 얼굴 아래에는 그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다. 현우가 본인의 신분 정보를 보여 주었을 때도 오류가 나던 시스템이, 화면 속 얼굴은 아무 망설임 없이 원본으로 인정했다. “송출 중인 영상인가요?” 가은이 물었다. 방송국 관리자는 고개를 저었다. “생방송 장비는 모두 꺼져 있습니다. 저건 어디서 온 신호인지 모르겠어요.” 화면 속 남자가 웃었다. “늦게 왔네.” 현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목소리마저 똑같았다. 동작도, 숨을 쉬는 간격도. 하지만 그가 손을 올리는 방향만 달랐다. 화면 속 남자는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으로 유리를 세 번 두드렸다. “넌 누구야?” 현우가 물었다. “너 대신 기다린 사람이야.” “누가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짧은 침묵이 처음으로 사람 같았다. “그건… 기록에 없어.” 주영의 음성이 통신기로 들렸다. “이게 02가 만든 대체 참조 같습니다. 실제 사람을 본떠 만든 기록일 수도 있고, 반응하는 영상일 수도 있어요. 증명되기 전에는 어느 쪽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화면 속 남자는 갑자기 현우를 똑바로 노려봤다. “네가 원본이라는 말도 기록에 없잖아.” *** 현우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원본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건 쉽지만,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자료는 이미 대부분 손상됐다. 그는 시선을 돌려 가은을 보았다. “제가 지금 여기 있다는 건 보시죠?” “네.” “그것부터 기록해 주세요.” 가은이 휴대용 녹음기를 켰다. 그녀는 현우가 서 있는 위치와 당시 동행한 사람, 확인 가능한 출입 절차를 말로 남겼다. 이어 화면 속 상대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이 장소에 들어왔습니까?” 남자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나는 항상 여기에 있었어. 09가 기다려야 하니까.” “누가 그렇게 명령했습니까?” “보호 대상은 계속 대기해야 해.” 가은은 한 번 더 물었다. “그 대기 상태가 언제 시작됐는지 아세요?” 화면 속 남자는 잠시 깜빡이더니 오래된 수문 사진을 내보냈다. '개방 시간'이라는 글씨가 화면 가운데 떴지만, '생환 확인 시각'은 빠져 있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보호 중.” “보호를 확인한 사람은요?” “보호 중.” 그 짧은 대화에 현우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 존재는 자신과 같은 얼굴로 대답하지만, 실제로 기다림을 겪은 사람처럼 행동하지 못했다. 그저 기록에 써 있는 한 문장을 무한히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우가 대답하지 못했던 부분과 달랐다. 저 남자는 기록 밖의 자신의 과거를 전혀 알지 못했다. 들어 있는 것은 같은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02가 정해 놓은 규칙뿐이었다. “그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현우가 말했다. “그러나 왜 그런 모습으로 여기 있는지는 알아내야 해요.” 가은은 관리자에게 영상 입력선을 차단하도록 지시했다. 모니터는 꺼졌다. 동시에 인접한 비상 방송 스피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는 건 위험해. 보호하려면 계속 기다리게 해야 해.” *** 주영이 로그를 추적하는 동안 세아가 낡은 수첩 사진 한 장을 보냈다. 그림 속 아이들은 수문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문 안쪽에서 다섯 번 두드리는 신호가 왔지만, 바깥에서도 같은 신호가 들렸다. 세아의 설명은 짧았다. '안에 있던 애는 계속 문을 열라고 한 게 아니었어. 살아 있다는 걸 알려 주려고 두드렸지. 너도 그 말을 알아들었어.' 현우는 00 상담실에서 서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름을 말할 때까지 기다릴 장소.' 대기 종료의 조건은 어떤 아이가 문 안에서 나와 현우에게 자기 신원을 공개하는 일이 아니었다. 문 안의 아이가 살아 있다는 확인을 받은 순간, 그가 맡은 대기는 끝났어야 했다. 그런데 현우는 그 말을 한 번도 직접 듣지 못했다. 02가 대기자 명단을 유지하며 응급 접수증을 분리 보관했기 때문이다. “주영 씨, 06시 22분 31초 원본 접수증 기억하죠?” “네.” “그게 의료기관에 도착했다는 기록입니다. 소멸 예고를 끝낼 확인 증거가 될까요?” “의료기관에서 실제 살아 있었다는 증거로는 강합니다. 하지만 전산 신청은 지금 02가 먼저 접수하고 있습니다.” 가은이 물었다. “그럼 원래의 수기 절차는 어디로 갔나요?” 세아가 전화를 끼어들었다. “00 상담실에 있을 거야. 서림 선생님 수첩 맨 뒤에 '대기 해제'라고 적힌 종이가 있었거든. 시스템이 생기기 전에도 쓰던 양식이야.” *** 현우는 은곡방송국 창가에서 자신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유리에 비친 것은 이번에는 정상적인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위의 붉은 숫자는 오차 없이 줄고 있었다. [27:12:03] 가은이 말을 꺼냈다. “신청은 지금 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대신 그때 살아 있었다는 아이의 이름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름을 말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걸 바꾸라고 압박할 생각은 없어요.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현우는 카세트테이프를 손에 쥐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누군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기록이 아니었다. 문 밖의 아이를 혼자 두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방송국을 나서는 순간 제어실에서 마지막 안내음이 울렸다. [대기 해제 요청 차단] [사유: 원본 신청자 중복] 현우는 뒤돌아봤다. 꺼진 모니터에 얼굴 하나가 잠깐 떠올랐다. 그 얼굴은 자신이 아니었다. 스무 해 전 서람초의 교복을 입은 어린아이였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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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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