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유리문에 찍힌 손자국은 아침이 돼도 지워지지 않았다.
관리 직원은 청소 용액을 뿌렸다가 손을 거뒀다. 작은 손바닥 다섯 개가 유리의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쪽은 벽으로 막혀 있었다.
가은은 사진을 찍고 구역을 봉쇄했다. 주영은 유리의 제작 시기를 확인했다. 벽이 세워진 것은 십칠 년 전이었다. 누가 지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환영이라면 손자국이 남지 않았겠죠.” 태경이 말했다.
“환영도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일이 이 도시에서는 일어났어요.” 주영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원인을 미리 한 가지로 정하면 안 됩니다.”
현우는 가은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사진을 찍던 카메라를 내리고 말했다.
“제가 믿는 건 지금 여기 있는 현우 씨예요.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인해야죠.”
누군가에게 믿음을 요구받는 순간 현우는 이상한 불편함을 느꼈다. 가은에게는 자신을 알아본다는 증거가 있었지만, 곧 그 증거마저 사라질지 모른다.
***
그날 오후, 현우가 잠시 살던 원룸에서 집주인이 연락해 왔다.
“계약자 정보가 없어졌어요. 방 안에 물건은 있는데 누구 물건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현우는 집주인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갔다. 신발장에는 운동화 두 켤레가 있었다. 냉장고에는 유통기한이 이틀 남은 우유. 벽에는 자신이 직접 그린 지도와 이름이 적힌 메모가 붙어 있었다.
집주인은 그 모든 걸 보면서도 현우와 연결하지 못했다.
“물건을 가져가시면 안 됩니다. 소유 관계를 확인해야 해요.”
현우는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집주인이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름 대신 월세 송금 시각과 방 열쇠의 일련번호를 보여 주었다. 집주인이 기록을 대조하는 동안 그는 방에 다시 들어가 보았다.
책상에는 스무 해 전 서람초를 그린 낡은 그림이 있었다. 현우는 그 그림을 언제 그렸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림 속 수문 앞에는 아이가 둘 서 있었고, 문 안쪽에는 물방울 같은 점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 점 주위만 연필이 여러 번 덧칠돼 있었다.
가은은 방 입구에서 물었다.
“그 그림에도 세 번, 두 번 두드리는 신호가 있네요.”
현우가 가까이 봤다. 벽면 오른쪽 아래에 짧은 선 다섯 개가 찍혀 있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두 무리였다.
“그날 이후에도 기억하려고 그렸나 봐요.”
그림을 만지자 눈앞에 갑자기 학교 복도가 펼쳐졌다. 어린 자신이 문 앞에서 운동화를 벗고 있었다. 물을 밟으면 소리가 너무 커져서 안의 아이가 무서워할까 봐 조심했다. 문을 세 번 두드리자 안쪽에서 두 번 대답했다.
'살아 있어?'
'응.'
말보다 먼저 신호가 오갔다.
현우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책상 가장자리를 붙들고 있었다. 붉은 글씨는 사십 시간 아래였다.
가은은 그를 침대에 앉힌 뒤 물을 건넸다. 잠깐 정신을 잃었다 돌아온 것인지, 기억이 겹친 것인지 둘 다 알 수 없었다. 그는 몇 번이나 그림을 손에 쥐어 보았다. 선은 흐려졌지만 종이 끝에 묻은 푸른 물감은 그대로였다.
“제 손으로 그린 게 맞을까요?”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봐야겠죠.” 가은이 대답했다. “당신이 기억한다고 해서 모두 사실인 것은 아니고, 기억하지 못한다고 없었던 일도 아니니까.”
그는 종이를 접지 않고 보호용 봉투에 넣었다. 어릴 적 자신이 그려 놓은 작은 점 하나가 이제는 한 사람의 목소리만큼 중요해 보였다.
***
그날 저녁, 전산팀이 회수한 서람시의 서버 로그에는 새로운 접속이 찍혀 있었다.
[09 보호 대상 재접속]
[접속 위치: 은곡방송국]
[접속자 검증: 완료]
접속 시각은 현우가 원룸에 있던 시간과 정확히 겹쳤다.
“나 아니에요.” 현우가 말했다.
“알아요.” 가은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우리도 여기 있었잖아요.”
그러나 시스템은 은곡방송국에 있는 누군가를 '원본 09'라고 판정하고 있었다. 현우의 계정만 지워지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주영은 한참 로그를 들여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가 단순한 도용자가 아니라면 더 위험합니다. 대기 종료 신청 권한을 가진 사람은 원본 요청자 한 명이어야 하니까요. 가짜를 진짜로 확정해 버리면 현우 씨의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가은은 급히 공문을 보내 은곡방송국 장비의 변경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담당 기관에서 확인 전화를 걸어 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서버 로그의 다음 줄에 새로운 문장이 떴다.
[원본 09의 요청: 대기 상태 유지]
현우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누군가 그의 이름으로 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
밤 열 시, 편의점 점원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현우가 낮에 남긴 문의 번호를 찾다가 메모가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손님, 지금도 저희 가게 자주 오시는 분 맞죠?”
“그렇습니다.”
“이상해요. 얼굴을 떠올리면 분명 어제도 왔던 분인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요. 적립 명단도 없어졌고요.”
현우는 손을 꼭 쥐었다.
“그럼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제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어제 실제로 누가 커피를 사 갔는지만 기록해 주세요.”
점원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건 기억해요. 당신이 오셨고, 제가 커피를 드렸어요.”
전화가 끊어진 뒤 현우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행동이 더 확실한 증거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름을 되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세상에서 지워지는 모든 행위를 함께 되돌려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때 은곡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현우 씨를 본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방송국 유리창 앞에 서 있다고 합니다.'
가은이 화면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방금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고 해요. 동행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현우의 이름이 붉게 일렁였다.
[37:08:19]
제86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