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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84화
PAYLUA ORIGINAL · 제84화

84화. 테이프에 남은 빗소리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2,720자

오프라인 책장
비상등이 켜지자 00 상담실 벽의 그림들이 붉게 물들었다. 가은은 곧바로 복도로 나가지 않았다. 전원 차단 뒤 누군가 건물을 드나들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관리인은 계단에서 대피 안내를 하고 있었고, 주영은 전화로 분전반 상태를 점검했다. “건물 전기 계통은 정상입니다.” 주영이 말했다. “00 상담실만 제어 신호가 들어왔어요.” “외부에서요?” “정확히는 오래된 보안 제어기에 남아 있는 예약 명령입니다. 그런데 예약된 날짜가 오늘이 아니에요. 스무 해 전이에요.” 현우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오후 두 시였지만 초침이 거꾸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붉은 카운트다운은 단숨에 51시간을 가리켰다. 서림은 떨리는 손으로 카세트테이프를 작은 재생기에 넣었다. 전원이 나간 구식 기계가 건전지로 돌아갔다. 처음 들린 것은 아이들이 물을 철벅이는 소리였다. 이어 어른 여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아이들이 안쪽에 있어요. 함부로 문을 열면 안 됩니다. 저 아이도 기다리느라 추워요. 어른을 불러 주세요.' 서림의 목소리였다. 그보다 젊고 다급했다. 잠시 후 남자 목소리가 말했다. '대기자가 남아 있으면 관리 기록이 계속 열려 있습니다. 보호 대상 처리하면 되죠.' '어떻게요?' '기다리는 사람을 따로 빼요. 존재 참조를 끊으면 문은 닫힙니다.' 이어 테이프가 탁 하고 끊겼다. 가은은 재생을 중지했다. “이 사람 누구예요?” 서림은 눈을 감았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요. 수문과 보호소 간 시스템을 설치하러 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파견표도 여러 번 바뀌었고요.” 그들이 세 번 반복해 테이프를 듣는 동안 서림은 말을 아꼈다. 두 번째 재생이 끝나자 그녀는 가은에게 멈춰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저는 저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외부 참조를 끊는다는 표현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러면 동의하신 적은 없습니까?” “없어요. 하지만 위험한 말인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책임은 남습니다. 나중에 이관 문서를 보고 항의했는데, 아이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고 했어요.” 가은은 그 말을 원래 진술과 구분해 기록했다. 기억이 뒤늦게 연결될 때는 사람마다 순서가 뒤바뀔 수 있었다. 서림이 정확히 기억하는 말과 당시 기록에서 확인해야 할 말이 다르다는 점을 남겼다. 현우는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낯선 소리였다. 하지만 그 속에 익숙한 말투가 숨어 있었다. '보호'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만 목소리가 이상하게 부드러워지는 것. 02가 다른 사건에서 들려주던 안내 방송과 닮아 있었다. “02는 이때부터 있었던 걸까요?” “현재의 02가 그때도 있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죠.” 가은이 말했다. “목소리는 복제될 수도, 녹음된 말이 재사용될 수도 있어요.” *** 건물이 다시 밝아졌을 때 모두는 상담실을 떠났다. 그러나 가은이 현우를 차에 태우려던 순간 비슷한 모양의 회색 승합차가 길 건너에 섰다. 안에서는 검은 우산을 든 남자가 내렸다. 그는 서림을 보더니 마치 오래된 지인을 만난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아직 여기 계셨군요.” 서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내민 명함에는 '시설 안전 점검'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저 건물은 곧 폐쇄될 예정입니다. 원본을 가지고 나가시면 보존 규정을 어기는 겁니다.” 가은이 공문을 보여 주었다. “입회하에 봉인했습니다. 반출 과정도 기록돼 있어요.” 남자는 시선을 현우 쪽으로 옮겼다.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시죠?” 현우가 대답하려고 하자 남자의 귀에 낀 이어폰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억 대상 불일치. 확인하지 마십시오.'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현우를 다시 보며 뒷걸음질 쳤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현우가 없었던 것처럼 차 문을 열었다. 가은이 그를 붙잡지 않은 것은 추적할 방법이 있어서였다. 나경이 도로 건너편 차량 번호를 촬영했고, 차량 소유 법인은 정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법인의 주소는 서람시가 아니었다. 은곡역 인근의 한 낡은 방송국 건물이었다. *** 저녁 무렵 기록관으로 돌아온 현우는 자신이 입고 온 외투 주머니에서 영수증을 꺼냈다. 오전에 산 커피 두 잔 값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결제자 이름은 공란이었고, 가게 위치는 숫자로만 남아 있었다. 하린이 그 옆에 앉았다. “오빠.” “응.” “내가 오늘 아침에 오빠한테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나?” “종이배 얘기?” 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오빠한테 도망가도 된다고 했어. 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여기 남을 필요는 없다고.” 현우는 그제야 희미하게 그 말을 떠올렸다. 하린은 오래된 수문 안쪽의 아이가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곁에 앉아 있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도망가면 나를 잊을까 봐 무서워.” 현우가 말했다. 하린은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오빠가 없는 동안 내가 오빠를 기억한다는 말로 붙잡지는 않을게. 그래도 여기 있다는 건 계속 말해 줄 거야.” 그날 밤 현우는 처음으로 잠들기 무서웠다. 눈을 감았다 뜬 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남을지 알 수 없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가은이었다. “현우 씨, 나경 씨가 보낸 영상을 봐야겠어요.” 화면에는 조금 전 보건지소 앞에서 찍힌 차량 영상이 있었다. 우산을 든 남자가 차에 타는 순간, 조수석의 유리창에 다른 얼굴 하나가 비쳤다. 현우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는 건물 반대편에서 가은과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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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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