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가 가장 먼저 잃은 것은 신분증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늘 가던 편의점에서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던 점원이 그를 처음 온 손님처럼 대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늘 드시던 걸로 드릴까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점원은 여전히 그가 마시는 커피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런 주문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표정이 텅 비어 있었다.
“혹시 제 이름도 기억하세요?”
“죄송해요. 손님 성함은….”
점원은 눈앞에 있는 현우의 얼굴을 보면서도 곤란해했다. 계산대 옆의 단골 적립 명단에는 분명 '이현우'가 있었는데, 글자가 두 글자씩 떨어져 빈칸으로 바뀌고 있었다.
현우는 계산을 마치자마자 매장을 나왔다. 유리문에 비친 이름은 여전히 붉었다.
[이현우 / 63:21:04]
그는 차 문을 열다가 가은의 전화를 받았다.
“바깥에서 혼자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사라지는 순서를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다음에는 저랑 같이 해요. 확인하려다 사고 나면 조사할 시간이 더 줄어요.”
현우는 그 말에 웃으려 했지만 웃음이 나지 않았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사실 하나를 확인할 때마다 세상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 하나가 없어지고 있었다.
***
기록관 회의실에는 가은, 태경, 주영, 나경이 모였다.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세아가 보내 준 서람초 수첩의 페이지 사진이 있었다. 서림이 원본 수첩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높았지만, 그녀는 며칠째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경이 노트북을 돌렸다.
“어제 도서관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 두 장이에요. 이건 제가 따로 백업한 파일이고, 이건 도서관 서버에서 내려받은 파일.”
첫 번째 사진에는 현우가 앉아 있었다. 두 번째 사진에는 빈 의자와 바닥에 닿지 않은 컵이 있었다.
“사진을 지웠다고 해서 사람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태경이 말했다.
“서버 파일만 변했으면 그렇게 말했겠죠.” 나경은 필름 카메라로 찍어 인화한 사진을 내놓았다. “이건 아직 현우 씨가 있어요. 하지만 이름을 적어 둔 뒷면의 잉크는 조금씩 흐려집니다.”
누군가가 컴퓨터를 해킹하는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전산 기록, 기억, 잉크가 서로 다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현우는 수첩을 덮었다. 자신이 맡았던 사건들이 더 이상 숫자놀이가 아닌 이유가 거기 있었다. 존재를 지우는 힘은 서류 한 장을 수정하고 끝나지 않았다.
주영은 가설을 세 가지로 나눴다. 원본 문서를 손상시키는 현상. 기록과 사람의 기억을 연결한 참조 관계의 삭제. 그리고 02가 그 둘을 동시에 이용하는 경우.
“문제는 그 어느 것도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태경은 한동안 말을 듣다가 현우 앞에 자신의 수첩을 밀어 놓았다. 표지 안쪽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있었다.
'오늘 이현우가 먼저 나에게 물을 건넸다.'
현우가 놀라서 태경을 봤다.
“왜 이런 걸 적었어요?”
“저도 기억을 잃어 봤으니까요. 누군가 내게 친절했다는 사실을 잃으면, 다음번에 그 사람을 믿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나중에 제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이 문장은 제가 직접 썼다고 말할 수 있도록요.”
가은은 태경의 수첩에 시간을 적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부탁했다.
“억지로 기억하려고 하지 마세요. 지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각자 구분해서 써 주세요. 다른 사람한테 들은 것과 직접 본 것을 섞으면 02에게 틈을 줍니다.”
그들은 하나씩 펜을 들었다. 누군가는 이름을 썼고, 누군가는 얼굴의 특징을, 누군가는 현우가 무심코 하는 버릇을 적었다.
나경은 현우를 보며 자신이 인터뷰했던 첫날의 일을 되짚었다. 그는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 앞에서 기자에게 되묻는 대신 잠깐 목을 축이곤 했다. 그 버릇을 적는 순간 그녀의 녹음기 화면에서 인터뷰 파일 제목의 이름이 지워졌다.
“인터뷰 내용은 남아 있어요.” 나경이 말했다. “이름만 없어요. 그럼 저는 나중에 이 목소리를 누구에게 귀속시킬 수 있죠?”
“제 이름이라고 쓰려면 제가 했던 말인지 확인해야겠죠.” 현우는 녹음기를 가리켰다. “그 문장이 제가 한 말이라는 사실부터요. 틀리면 다시 듣고 고치면 됩니다.”
나경은 대답을 대신하여 녹음 파일 생성 시각과 그날의 취재 일정을 종이에 따로 옮겼다. 한 사람의 이름이 지워져도 취재가 이루어진 사실은 남길 수 있었다. 나경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대답한다'라는 문장을 썼다. 현우는 자신이 그 말 때문에 누구에게 원망을 샀었는지 떠올렸다.
***
점심 무렵 하린이 찾아왔다.
“오빠, 이거 보려고.”
그녀는 손에 쥔 종이배를 펴 보였다. 전날 현우가 집에서 건네준 종이였다. 한쪽에는 하린의 글씨로 '민하린'이라고 적혀 있었고, 반대편에는 현우가 적어 준 우편함 번호가 남아 있었다.
“이름이 사라지면 다 없어지는 줄 알았는데.” 하린이 말했다. “내가 접은 선은 남아 있네.”
주영이 선뜻 희망적인 결론을 내리려 하자 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이게 오빠를 살리는 증거라는 말이 아니야. 그냥 아직 남아 있는 거야.”
현우는 하린이 어른들보다 정확하게 상황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렸다.
그때 가은의 휴대전화에 짧은 경고가 도착했다. 서림의 연락처로 추적한 오래된 공공전화 사용 기록이었다. 마지막 통화는 어젯밤. 장소는 폐쇄된 외곽 보건지소.
발신 시각 06시 22분 31초.
스무 해 전, 문밖으로 나온 아이가 보건소에 접수된 바로 그 시각이었다.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봐야겠네요.”
가은은 서둘러 열쇠를 챙겼다. “이번에는 같이 갑니다.”
회의실에서 나오던 나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녀는 현우의 얼굴을 보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까 여기 앉아 있던 사람, 제가 인터뷰하던 분 맞죠?”
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불과 두 시간 전까지 자신과 대화를 나눴던 기자의 기억에서 첫 번째 조각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제8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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