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장소는 우편함 00이 아니었다. 등록 08이 고른 곳은 강변의 작은 도서관이었다. 책을 빌려 가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밝은 건물, 출입이 통제되지 않은 공개 공간이었다. 그녀는 편지에서 '누군가 지켜본다는 이유로 내 주소가 알려지지 않는 곳'이라고 덧붙였다.
현우는 가은과 함께 도서관으로 갔다. 두 사람은 마주 앉을 때까지 상대의 얼굴을 사진으로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인물이 자기 이야기를 직접 시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창가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짙은 색 외투를 입고 한 손에는 빨간 장갑 한 짝을 들고 있었다. 다른 손목에는 노란 실이 아주 낡은 매듭으로 감겨 있었다.
그녀가 먼저 일어났다.
“늦지 않았네, 아홉 번째.”
현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린 시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비에 젖은 복도의 냄새가 났다. 그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누구세요?”
여자가 대답했다.
“한세아라고 해. 지금 내가 쓰는 이름이야.”
그녀는 작은 명함을 내밀었다. 직업도 주소도 없는 카드였다. 이름 아래에는 연락을 허용한 중계번호 하나만 적혀 있었다. 현우는 카드를 받았지만 주머니에 바로 넣지 않았다.
“등록 08이 당신입니까?”
“내가 그 표식을 사용한 사람인 건 맞아. 하지만 거기 남은 모든 글이 내 행동이라는 뜻은 아니야.”
“그럼 스무 해 전 문 밖에 있던 아이도?”
세아는 한참 현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날 네 옆에 있었던 사람이야. 네가 자꾸 문을 열려고 해서 손목을 잡았었지. 안에서 나오겠다는 말이 들리지 않았거든.”
***
도서관의 작은 회의실은 예약돼 있었다. 세아는 비공개로 자신의 증언을 남기기로 했지만, 기사나 인터뷰로 공개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가은은 그 조건을 확인하고 입회했다.
세아는 낡은 수첩을 펼쳤다. 첫 장에 어린아이 글씨로 쓴 문장이 있었다.
'배를 접을 때는 종이가 찢어지지 않게 천천히.'
“그날 우리가 왜 종이배를 만들었는지 알아?” 세아가 물었다.
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서람초가 침수됐을 때 아이들이 무서워했어. 누가 물을 건너 편지를 보내면 답장이 돌아올 거라고 했지. 우린 그 말을 믿었어. 진짜 배가 아니어도 누가 읽어 준다는 사실이 좋았거든.”
그녀는 수첩 다음 장을 펼쳤다. 빨간 장갑을 낀 아이 두 명이 그려져 있었다. 한 명의 손에는 회색 장갑이 더해져 있었다.
“문 안쪽 아이가 누구인지 몰랐어. 그 아이는 이름을 알려 주는 걸 무서워했지. 그래서 우리는 뭘 먹었는지, 어디가 아픈지, 오늘 잠은 잘 잤는지만 물었어.”
“그럼 민하린이라는 이름은?”
“내가 지어 준 건 아니야. 바깥에 있던 아이가 하루만 쓰라고 빌려줬다는 얘길 들었어. 그 아이가 지금 네 옆에 있는 하린이와 같은 사람인지는 나도 몰라.”
현우는 여러 번 들었던 대답을 이번에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모른다는 말은 회피가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을 남겨 두는 용기일 수 있었다.
세아는 수첩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08은 답장을 받았다는 도장.'
'09는 문 앞에서 기다렸다는 표시.'
“너희를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한 건 나중이야. 우리가 번호로 태어난 건 아니었어.”
***
가은은 세아에게 02의 변경 규칙을 보여 주었다. 세아는 종이를 오래 들여다봤다.
“내가 도장 보관함을 알려 준 건 사실이야. 어떤 어른이 답장을 모아 보관하자고 했어. 나는 그게 아이들 편지를 안전하게 지키는 일인 줄 알았어.”
“그 어른이 누구였습니까?”
“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서람초에서 나간 뒤 다른 보호소를 옮겨 다녔고, 그때마다 명칭이 바뀌었어요. 목소리만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지금 특정인을 지목할 수는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내가 도장 위치를 알려 줬다는 사실은 남겨 주세요. 그걸 이용해서 누가 어떤 명령을 만들었는지도 밝혀졌으면 해요.”
현우는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이 세아를 찾아온 이유를 다시 생각했다. 범인을 잡기 위한 단서를 얻으려 했던 것이 아니다. 세아가 자신을 대신해 무엇을 결정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세아가 할 수 있었던 일과 어른들이 그 후에 한 일을 분리해야 했다.
“당신이 그날 살아남은 사람에게 장갑을 줬다는 것도 기록할까요?”
세아가 웃었다.
“그건 해도 돼. 대신 누구에게 줬는지는 아직 말하지 않을래. 그 애의 이야기는 그 애 거니까.”
***
그날 오후, 서람시 기록관은 일곱 구역의 중계 기능이 복원됐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복원이 곧 연락 허가나 귀환 승인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도 함께 명시했다. 첫 번째 구역에서는 답장 수신을 계속 거절했고, 두 번째 구역은 일주일 뒤 다시 물어봐 달라고 요청했다. 세 번째 구역에서는 아직 아무 회신이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다른 상태였다.
나경은 기사에서 숫자 대신 그 차이를 썼다. '일곱 사람이 돌아왔다'가 아니라 '일곱 통로가 다시 연결됐고 답장을 선택할 권리는 그대로 남았다.' 그녀는 그 문장을 쓰고 나서야 조금 숨이 놓였다.
종수는 임시 관리자의 인수 확인이 끝난 뒤 우편함의 열쇠를 돌려주었다. 노인은 열쇠를 내려놓고도 한참 손을 떼지 못했다.
“이걸 놓으면 편지가 없어질 줄 알았소.”
“이제 당신이 잠든 시간에도 누군가 지킬 겁니다.” 가은이 말했다.
종수는 문밖 햇빛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오늘은 집에 가겠소. 오래간만에 정말 집에.”
***
세아의 증언은 하린에게도 곧바로 전달되지 않았다. 세아는 자신의 이름과 과거 이야기를 하린에게 알려도 좋다고 했지만, 하린이 그것을 듣고 싶은지는 따로 확인해야 했다.
현우가 집으로 전화를 걸자 하린은 잠깐 말이 없었다. 현우가 '08이라는 번호를 썼던 사람이 자기 이름을 알려 줬다'고 말하자, 하린은 바로 이름을 묻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물었다.
“그 사람은 잘 지내요?”
“지금은 그렇대.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럼 제가 편지 써도 된다고 물어봐 주세요.”
현우는 세아에게 그 의사를 전했다. 세아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괜찮아. 읽을 준비가 되면 읽겠다고 전해 줘.”
하린은 그 말을 듣고 공책을 펼쳤다. 첫 문장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지금 민하린이라고 불려요.' 두 번째 문장은 오래 고민했다. '당신에게도 좋은 이름이 있기를 바라요.' 마지막에는 종이배를 그렸다. 점은 하나만 찍었다. 자신이 지금 쓰는 표식이었다.
현우는 그 편지를 접지 않았다. 보내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고칠 수 있도록 책상 위에 펼쳐 두었다.
도서관에서 헤어지기 직전 세아는 현우를 다시 불렀다.
“한 가지 더 있어.”
그녀는 수첩에서 얇은 종이를 떼어 냈다. 오래된 등록표의 복사본이었다. 위쪽에는 [기록 09]라고 적혀 있었고, 옆에는 어린아이 필체로 '문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건 서림 선생님이 네 이름을 적기 전의 종이야.”
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서림 씨가 09를 기록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까?”
“아니. 서림 선생님도 자기 장부에 적었어. 그런데 그 전에 이미 이 표가 있었어. 그날 누가 먼저 09라고 불렀는지 생각해 봐.”
현우는 오래된 종이를 보았다. 숫자 09 밑에는 이름 칸이 비어 있었다. 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연필 글씨가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기다릴게.'
그것은 현우가 어린 시절 쓰던 글씨와 닮아 있었다.
세아는 조용히 말했다.
“그 글을 네가 썼어. 그런데 다른 아이 대신 적은 게 아니야. 문을 지키겠다고 네가 스스로 써 놓은 약속이야.”
현우의 머릿속으로 오래전 복도가 스쳤다. 젖은 운동화, 불 꺼진 교실, 서랍 위의 연필. 도망갈 수 있었던 그날 자신이 남기로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때 주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현우가 받자 주영이 다급하게 말했다.
“09의 초기 등록표를 찾았습니다. 한세아 씨 말대로 서림 씨가 기록하기 전의 사본이 있어요. 그런데 그 아래 하나가 더 있습니다.”
“뭡니까?”
“그 표를 승인한 계정이에요.”
현우는 수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원본 승인: 00]
[최초 명령: 대기자를 보호 대상으로 전환]
[전환 대상: 이현우]
그는 말없이 세아를 바라봤다. 세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 문장은 내가 처음 보는 거야.”
그리고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이 붉게 빛났다.
이현우.
[소멸 예정 71:59:59]
제8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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