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이현우는 마이크를 잡은 손이 갑자기 아래로 끌리는 느낌에 몸을 숙였다. 지상에서 반짝이던 붉은 이름들이 하나씩 방향을 바꾸더니 모두 그를 향해 기울어졌다. 하늘에 떠 있는 바늘 수백 개가 한쪽 자석을 찾는 것 같았다.
회수 담당자는 계단 중간에 서서 말했다.
"비인가 관찰로 조정 대상이 확대되었습니다. 원인 제공자는 책임을 인정하고 즉시 귀속하십시오."
"내가 무슨 책임이 있다는 겁니까?"
현우가 소리쳤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손바닥을 폈다. 손바닥에는 작은 검은 서류철 모양이 떠 있었다.
[사유: 지정 구역 외 기록 열람]
[관리번호: 000-012]
하린이 다급하게 말했다.
"인정하지 마세요. 말을 시키는 건 그게 목적이에요."
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이미 이름들을 읽어 왔고, 사람들이 그 탓에 더 위험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박정호를 쫓았고, 경찰서를 나와 서태경을 만났고, 마침내 시장의 문을 열었다. 그 모든 선택이 이곳으로 이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지워지는 책임까지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가은이 그의 옆에 섰다.
"지금 중요한 건 누가 잘못했느냐가 아니에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내보내느냐죠."
그녀는 시장의 구조를 살폈다. 입구 계단은 하나뿐이었다. 가게마다 뒤편 통로가 있는 듯했지만 모두 잠겨 있었고, 천장 위로 뻗은 스피커 선은 구역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사람들을 지상으로 내보내기만 하면 기억 조정이 끝나는 건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대상자 수가 백스물여덟 명이라면 한 명씩 확인할 시간은 없습니다."
가은은 수첩에 선 두 개를 그었다.
"원인을 잠깐이라도 멈출 수 있습니까?"
기억 수선 가게의 노파가 대답했다.
"모두의 기록을 동시에 바꾸려면 기준 시간이 필요하지. 열 시든 열한 시든 특정 시각에 맞춰 장부를 닫아야 해. 그때까지 새로 생긴 관계는 장부가 다시 계산해야 하고."
"그럼 계산을 계속하게 만들면 되겠네요."
가은이 말했다.
"네?"
"새로운 관계가 계속 생기도록요."
세진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스피커로 방송을 이어 가면 되는 거군요."
"방송만으로는 부족해요. 서로 무슨 일을 했는지 진짜로 남겨야죠."
그들은 역할을 나눴다. 세진은 지상으로 올라가 사람들을 한데 모으기로 했다. 태경은 시장 끝 통로에서 회수 담당자들의 접근을 살피고, 하린은 노파와 함께 지하 기록 창구를 찾기로 했다. 현우와 가은은 마이크를 사용해 지상 사람들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도록 도울 참이었다.
작전이라고 부르기에도 허술했다.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힘이 얼마나 큰지, 심지어 저들이 실제로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만큼은 선택할 수 없었다.
***
세진은 지상으로 올라가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시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사람이 되면 어머니와 오늘 나눈 저녁밥의 의미도 사라질지 몰랐다. 그래도 그는 주머니에서 밴드를 꺼내 손바닥에 붙였다.
'오늘 저녁 손을 치료해 준 사람.'
그 문장에는 아직 어머니 이름이 없었다. 세진은 이름을 적는 대신 오늘 어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손부터 치료하고 가요.'
그 기억은 분명 지금 만들어진 일이었다.
지상 광장에서는 혼란이 번지고 있었다. 한 청년이 여자친구에게 자꾸 누구냐고 물었고, 여자는 그가 어제까지 약속했던 장소를 나열하며 울고 있었다. 버스 운전기사는 갑자기 승객 숫자가 맞지 않는다며 출발을 거부했다. 분식집 사장은 앞치마를 두른 직원에게 왜 남의 주방에 들어왔느냐고 화를 냈다.
세진은 경찰 신분을 주장하지 않았다. 사라진 경찰서를 설명하는 데 쓰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대신 광장의 작은 무대에 올라 손을 높이 들었다.
"지금 이상한 일 겪으시는 분들, 이쪽으로 잠깐 와 주세요! 다른 사람에게 말할 필요 없는 개인정보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냥 방금 한 일 하나씩만 서로 기억해 주세요!"
그가 앞의 아주머니에게 귤 하나를 건넸다.
"지금 제가 드린 거예요.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한테요."
아주머니는 어리둥절하다가 귤을 받았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던 고등학생이 자기 친구의 어깨를 툭 쳤다.
"너 방금 귤 받은 거 봤지?"
"봤어."
작은 대답 두 개가 생겼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우스워하다가, 곧 서로가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오늘의 새 장면을 만들었고, 관계가 없는 사람들조차 귤을 나누거나 물병을 건네며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숫자가 조금씩 늦춰졌다.
현우의 눈앞에 떠오른 창에 새로운 글자가 나타났다.
[재계산 대상 128]
[미확정 관계 41]
[미확정 관계 73]
"효과 있어요!"
현우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가은은 조용히 그의 팔을 눌렀다.
"숫자는 우리만 보니까 바깥 사람들에게 겁주지 마요. 그냥 계속하도록 안내해요."
현우는 말을 고쳤다.
"좋습니다. 방금 기억한 일을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세요. 어떤 색이었는지, 어떤 말을 들었는지. 서로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그는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이었는지를 생각했다. 평소에는 이름을 부르면 돌아보는 정도로 끝났는데, 지금은 그 짧은 부름이 한 사람을 세계에 묶어 두고 있었다.
***
그러나 회수 담당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계단 위쪽에 검은 선이 번지더니 사람들이 하나둘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새 기억을 만들던 남녀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입을 움직여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정: 증인 관계 효력 중지]
회색 제복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지속적인 외부 간섭이 확인되었습니다. 증인 생성 행위를 제한합니다."
스피커에서 소리가 꺼졌다.
마이크를 붙잡고 있던 현우는 손끝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방금 전까지 말을 주고받던 지상의 사람들이 서로 멀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을 몰라보는 여자에게서 뒤로 물러났고, 아이는 어머니 치마를 붙잡았다가 누군지 모르겠다며 울었다.
가은은 회수 담당자를 바라봤다.
"방해가 되니까 막는군요.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태경이 시장 끝에서 달려왔다.
"안쪽에 장부가 있어요. 누가 어떤 관계를 만들었는지 적히는 장부요. 저 사람들한테는 우리가 만드는 새 관계도 기록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 장부를 없애면요?"
현우가 물었다.
태경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지워지지 않으려는 이유가 기록을 남기는 건데, 기록을 통째로 없애면 그 사람들과 다를 게 뭐 있겠어요."
가은은 잠시 생각했다.
"장부를 바꾸는 대신 확인을 늦출 수는 있겠죠."
노파가 시장 안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계단을 가리켰다. 천장에는 '접수실'이라는 낡은 표지가 매달려 있었다.
"그 안에 서명 대기 장치가 있어. 미처리 건이 쌓이면 마감할 수 없어."
현우가 되물었다.
"백스물여덟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니죠?"
"한 명이 백스물여덟 사람과 관계를 만들 필요도 없어. 서로 하나씩만 만들면 돼. 그 사람들 때문에 열린 문이 그 사람들 때문에 닫히는 거지."
***
세진이 위로 뛰어간 뒤 몇 분은 유난히 길었다. 현우와 가은은 스피커가 꺼진 뒤에도 광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볼 수 있었다. 시장 천장의 오래된 유리 장식에 바깥 풍경이 물결처럼 비쳤기 때문이다.
한 젊은 아버지가 유모차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아이는 계속 울었지만 아버지는 유모차 안을 내려다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가 누구인지 잊고 있는 듯했다. 현우는 무작정 달려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당장 그곳으로 가면 아버지에게 이름을 알려 줄 수는 있겠지만, 곧 다른 사람의 관계가 끊어질 것이다.
가은은 유리 장식에 비친 한 장면을 가리켰다. 노파가 손녀의 외투 단추를 채워 주다가 잠깐 손을 멈추었다. 손녀가 스스로 단추를 채우자 노파는 비로소 웃었다.
"저것 봐요."
"뭘요?"
"어떤 관계인지 떠올리기 전에 새로운 행동을 했어요. 단추를 채워 줬고, 아이가 배웠고, 둘이 웃었죠."
현우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백스물여덟 사람을 구하려면 거대한 영웅이 필요한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필요한 것은 한 번쯤 마주 보고 웃는 일이었다. 사라질 수 있는 것은 기록이었지만, 지금 막 만들어지는 관계는 아직 남아 있었다.
태경이 천장에 떠오르는 숫자를 보고 말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여기서 기다리면 저 사람들이 규칙을 또 바꿀 겁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죠."
가은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사람들하고 다르게 움직여야 해요. 저들이 기록을 폐기하려고 하면 우리는 새로운 기록을 접수하는 겁니다."
현우는 노파를 보았다.
"우리 같은 사람이 그 장부에 접근해도 되는 겁니까?"
노파는 신발 밑의 먼지를 툭툭 털었다.
"원래 누구나 접수는 할 수 있어. 다만 대부분은 남의 이름을 지우러 오지, 자기 이야기를 남기러 오지 않거든."
그 대답은 이상할 만큼 쓸쓸했다. 현우는 자신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관하는 곳이 이렇게 쓸쓸한 곳이라는 사실을 오래 기억할 것 같았다.
접수실은 은행 대기실을 닮았다. 번호표 기계가 벽에 붙어 있었고, 창구 뒤로 빛나는 서류철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종이마다 사람 이름 대신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창구 직원은 없었다. 카운터 위에 빈 장부 한 권만 펼쳐져 있었다.
[오늘의 기록 마감 대기]
[미확정 관계 97]
하린이 장부 앞에 섰다.
"여기서 다들 처음 보는 사이가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어요."
그녀는 주머니에서 낡은 연필을 꺼내 펼쳐진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처음에는 글자가 번지다가 간신히 남았다.
'민하린. 오늘 처음 만난 이현우가 내 이름을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현우가 문장을 읽고 덧붙였다.
'민하린은 남색 가방을 메고 있었고, 내게 무서운 사실을 숨기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오늘 이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하린이 현우를 보았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말했다.
"미안해. 네가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할 수 있게 해야 했는데."
하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에 푸른 선이 하나 생겼다.
가은은 두 사람 옆에 서서 자신에게도 오늘 처음 생긴 기억을 적었다.
'이현우와 민하린이 서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지금 여기 있었다.'
장부의 숫자가 빠르게 바뀌었다.
[미확정 관계 111]
[미확정 관계 123]
서람시장 전체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지진처럼 느껴졌지만 곧 누군가 거대한 종이 다발을 넘기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회수 담당자가 문턱에 나타나 팔을 뻗었다.
"그 장부는 승인받지 않은 증인에게 공개할 수 없습니다."
"공개하라고 한 적 없는데요."
가은은 장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우리는 우리 일을 적고 있을 뿐이에요."
남자가 손을 뻗자 페이지 위의 글씨들이 한꺼번에 흐려졌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장부를 품에 끌어안았다. 잉크가 손등에 묻었다. 검은 잉크가 아니라 어린아이의 운동화 자국, 식탁의 물 얼룩, 빗물이 마른 흔적처럼 서로 다른 색의 얼룩이었다.
그때 시장 바깥에서 세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백스물여덟 번째 사람입니다!"
노파가 접수실 문 옆 벽을 두드렸다. 벽에 있던 오래된 확성기가 잠깐 살아났다. 세진이 지상에서 두 사람을 데리고 계단으로 내려왔다. 한 명은 버스 정류장에 혼자 서 있던 노인, 다른 한 명은 그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한 젊은 여자였다.
"이 두 분이 서로 오늘 처음 만났대요. 그런데 노인분이 이름을 잊어버리셨거든요. 그래도 오늘 자리 내 준 건 기억하세요."
젊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먼저 양보했어요. 할아버지가 안 고맙다고 하셨는데, 무릎이 아프셔서 그러신 거라고 웃으셨어요."
노인이 작게 웃었다.
"안 고맙다는 게 아니라 아직 앉을 만하다고 한 거야."
두 사람의 웃음이 서로 겹쳤다.
[미확정 관계 128]
[대량 조정 마감 불가]
시장 전체의 붉은 글씨가 꺼졌다. 지상에서 사람들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는 왜 울고 있었는지 몰라 멋쩍게 웃었고, 누군가는 옆 사람의 손을 꼭 쥐었다.
현우는 잠시 안도했다. 그러나 회수 담당자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소리도 없는 얼굴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외부 대상의 조정은 보류되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나 접수실에 서명한 사람은 보류 대상이 아닙니다."
장부의 마지막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갔다.
[관리 구역 내 신규 등록자 3명]
[이현우 / 윤가은 / 민하린]
가은이 눈을 크게 떴다. 하린은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굳어 있었다.
회수 담당자가 조용히 말했다.
"서명하셨으니 이제 책임 있는 보관자가 되셨습니다. 원래 물건을 돌려주기 전까지 출구는 열리지 않습니다."
접수실의 문이 뒤에서 닫혔다.
그 문이 닫히는 소리 사이로, 현우는 멀리서 어린아이의 자장가가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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