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는 붉은 이름을 보자마자 종수에게 달려가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다. 노인은 북부 연락소에 있었고 현우는 시청 대조실에 있었다. 대신 그는 가은에게 전화를 걸어 정확한 시각부터 확인했다.
“26시간 58분. 임종수 씨의 이름 위에 보입니다.”
“생존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가은은 관할 구조대와 시설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곧 종수의 휴대전화가 연결됐다. 노인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숨도 잘 쉬고요. 그런데 우편함 앞에 이상한 게 있어요. 제가 놓지 않은 빨간 장갑 한 짝이요.”
현우는 창밖을 바라봤다. 지난번 이름이 붉어졌던 때도 그랬다. 숫자는 정확했고 자신은 조급해졌다. 숫자를 없애려고 덤비다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던 날들이 있었다. 이번에는 먼저 종수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기로 했다.
“오늘 혼자 계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동의하시면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건 좋겠소. 하지만 우편함은 비워 두면 안 돼요. 그게 걱정이군.”
“우편함은 다른 사람이 관리할 수 있게 조치하죠. 사람 대신 상자를 지킬 이유는 없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종수가 짧게 웃었다.
“스무 해나 지켰는데 이제야 그런 말을 듣는군요.”
***
종수가 구조대와 함께 시설에서 나오는 동안 주영은 붉은 예고가 시작된 시각을 다른 로그와 비교했다. 같은 시각 전산에서는 '최종 수거 책임자'를 한 명의 개인 계정으로 확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동안 공용 업무로 운영되던 우편함 관리 권한이 종수에게 한꺼번에 넘어간 것이었다.
“단순한 사망 예고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주영이 말했다. “이 시스템은 수거인이 사라진 뒤 남은 편지를 모두 미수신으로 바꿀 준비를 하고 있어요.”
현우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럼 종수 씨가 무사해도 기록에서 지워지면 같은 결과가 나겠네요.”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관찰한 이름의 소멸이 전산 처리와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에요.”
가은이 종이 지도 위에 선을 그었다. 임시 수거인을 한 명 더 배치하고, 현재 수거 책임자를 따로 기록하면 어떻게 될까.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에게 연락해야 하는지는 남기되, 누군가 한 명이 모든 편지의 운명을 쥐지 않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복수의 관리인이 필요합니다. 다만 각자가 편지를 열람할 수는 없게 해야겠죠.”
종수는 그 계획을 듣고 한참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쉬어도 누군가 돌볼 수 있겠군요.”
그는 일시적인 관리권 분리에 동의했다. 실제로 그가 확인한 것은 우편함 외관과 도착한 봉투의 수량뿐이었다. 어느 봉투가 누구에게 갔는지 아는 사람은 원래도 많지 않았다. 이 방식이라면 안전을 지키면서 다른 사람의 사생활도 보호할 수 있었다.
***
하린은 종수의 이름이 붉어졌다는 말을 듣고 과자 상자로 만든 우편함을 내려다봤다. 상자에는 아직 자기가 적은 '오늘은 말하고 싶지 않아요'라는 종이가 들어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답장을 다 읽었어요?”
“아니. 봉투를 옮기고 지킨 분이야.” 현우가 말했다.
“그런데 왜 할아버지가 사라져야 해요?”
현우는 말을 찾지 못했다. 하린이 물을 때마다 답은 간단하지 않았다. 시스템은 누가 실제로 일을 했는지보다 마지막에 누구의 이름이 적혀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게 잘못된 것 같아서 바꾸려 해.”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현우는 처음에는 없다고 말하려 했다. 하린이 위험한 곳에 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조금 생각한 뒤 다른 질문을 했다.
“너라면 마지막 수거인에게 어떤 말을 남길래?”
하린은 펜을 잡고 편지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적었다.
'오늘은 쉬셔도 돼요. 답장이 없어도 사람은 기다릴 수 있어요.'
현우는 종수의 동의를 받아 그 문장을 읽어 주었다. 종수는 전화기 너머에서 한동안 침묵했다.
“이렇게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소. 다들 언제 편지가 오느냐고만 물었거든.”
***
밤 열 시, 북부 연락소의 외부 조명이 꺼졌다. 시설의 전원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우편함 주위의 카메라가 동시에 검은 화면으로 바뀌었다. 대조실에 남은 주영이 별도 계통의 수문 센서를 확인했다.
[최종 수거인 변경 요청]
[후임자 없음]
[보관물 자동 폐기 준비]
“내일 새벽이면 편지를 폐기할 준비를 한다는 겁니다.”
“편지는 종이인데, 어떻게 없애죠?” 태경이 물었다.
“물리적으로 태우는 건 아닙니다. 보관함을 폐기물로 분류하면 수거업체가 이동시킬 수 있어요. 접수 번호도 끊기겠죠.”
가은은 시설 관계자에게 긴급 보존 명령 여부를 확인했다. 사유가 불명확한 폐기 요청을 보류할 근거가 있었다. 현우는 그와 동시에 우편함 안의 봉투 수량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낮 종수는 가은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우편함이 처음 설치됐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새집을 마련한 것처럼 환하게 웃는 종수 뒤로 어린아이 세 명이 서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빛에 날아가 구분되지 않았다. 종수는 그 사진이 늘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아이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나중에는 자신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증거를 갖고 싶어 여러 사람에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자랑한 건 우편함이 아니라 아이들이었어야 했소. 사람을 보살필 때도 그 사람이 원하는 만큼만 할 수 있었어야 하는데.”
“지금은 어떠세요?” 가은이 물었다.
“이 사진을 더 공개하지 않으려 해요. 그래도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건 누군가 기억해 줬으면 좋겠소.”
가은은 사진을 받아 보지 않았다. 대신 종수의 증언을 기록할지 확인했고, 종수는 자신의 근무 경위만 남기는 데 동의했다. 아이들의 얼굴과 그들의 현재를 추적할 이유는 없었다.
종수는 잠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기다려 준 사람이 있군. 오늘 밤 내 대신 연락소를 볼 사람들 말이오.”
열두 통이라고 하던 봉투가 열한 통이었다.
종수는 그 소식을 듣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통이 없어졌다고요? 그건 안 됩니다. 거긴 아직 답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가은이 그의 앞을 막았다.
“지금 혼자 돌아가시면 더 위험합니다. 분실 경위를 추적할 테니 여기 계세요.”
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보온병을 쥐었다. 그가 처음으로 우편함이 아니라 자기 몸을 지키기로 한 순간이었다.
그때 현우의 눈앞에 붉은 숫자가 다시 떴다.
[임종수 / 18:09:12]
그 아래 이제까지 보지 못한 글씨가 한 줄 따라붙었다.
[대체 수거인 미등록 시 생존 기록 폐기]
현우는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02는 한 사람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동시에, 그가 죽지 않더라도 존재를 지우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제7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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