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는 음성 파일을 가은에게 전송하지 않았다. 파일 앞에 붙은 조건을 읽었기 때문이다. '09에게 들려줘도 된다'는 것은 수사기관에 자료를 넘기겠다는 동의와 다를 수 있었다.
대신 자신이 들은 사실을 기록했다. 발신자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08의 도장 위치를 알고 있었으며, 누군가 그 위치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 가은은 그 기록을 바탕으로 원본 관리자의 접근 이력을 조사했다. 음성 자체를 증거로 내놓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원하면 발신자에게 추가 동의를 요청해도 됩니다.” 가은이 말했다.
현우는 대답하기 전 파일을 다시 재생했다. '도장을 어디에 두었는지는 내가 알려 줬어.' 누군가 잘못을 고백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것으로 이십 년 전의 사건이 설명되지는 않았다.
“먼저 도장이 무엇인지부터 찾아보죠.”
***
시설 기록관의 열쇠 관리 대장에는 도장 보관 위치가 두 차례 바뀐 것으로 적혀 있었다. 첫 번째는 20년 전 수문 관리소에서 학교 임시 대피소로, 두 번째는 12년 전 학교에서 북부 연락소로 옮긴 기록이었다. 문제는 두 번 모두 인수인의 이름이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업무 인계가 이렇게 허술할 수 있습니까?” 태경이 물었다.
종수는 난처한 얼굴로 손가락을 접었다.
“그때는 정신이 없었소. 수해가 계속됐고, 대피소를 여기저기 옮겨야 했으니까.”
주영은 관리소의 금속함을 살펴봤다. 오래된 도장 자국이 찍힌 종이가 한 장 남아 있었다. 그림은 숫자 08이 아니라 종이배 아래의 작은 점 두 개였다.
“도장이 08의 신분증이 아니라,” 주영이 말했다. “답장을 받았다는 표시였을 수 있어요.”
종수가 그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그렇소. 보내는 이가 자기 이름을 적지 못할 때 대신 찍어 준 거요. 누구인지 안다는 뜻이 아니라, 답장을 맡았다는 뜻이었지.”
그런데 지금 전산에서는 이 도장 자국이 08의 동의로 번역되고 있었다. 그것도 일곱 구역의 일괄 귀환을 승인하는 서명으로.
가은은 수첩에 적었다.
'접수 책임은 귀환 승인과 다름.'
이 짧은 문장이 어느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모든 일의 틈이 됐다.
***
정연실을 만난 하린은 아무도 준비하지 않은 질문을 했다.
“선생님, 그때 문 밖에서 장갑을 주운 아이가 울었어요?”
정연실은 잠깐 눈을 감았다.
“내가 들은 울음은 있었어. 하지만 누가 울었는지는 못 봤다.”
“그럼 그 아이가 잘못했어요?”
“어떤 잘못을 말하는 걸까?”
“도장이 어디 있는지 알려 줬대요. 그 일 때문에 누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그 애는 계속 미안해해야 할까요?”
정연실은 하린을 바라봤다.
“누가 그런 얘길 했니?”
“현우 오빠가 다른 사람이 보내 온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만 알려 줬어요. 내용은 저한테 안 들려줬고요. 제가 그냥 생각해 본 거예요.”
정연실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린아이가 한 행동 때문에 어른들이 사람을 위험에 빠뜨렸다면, 가장 먼저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그걸 이용한 어른일 거야. 하지만 그 아이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사실대로 들어봐야 해. 미안하다는 마음이 있다고 모든 사실이 증명되는 건 아니니까.”
하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을 대신해 결론을 내려 주지 않는 어른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
그날 오후, 주영은 제0분기의 변경 이력에서 오래된 규칙을 하나 발견했다.
[수신 확인 도장 / 구분코드 08]
[동의 대체 권한 / 없음]
아주 아래쪽에 새 규칙이 덧씌워져 있었다.
[기록 관리 편의를 위한 대체 승인 / 관리자 02 지정]
“언제 바뀐 겁니까?” 가은이 물었다.
“정확한 변경 일자는 로그가 손상돼 있습니다. 다만 이 규칙이 처음 사용된 뒤에 사람들이 사라진 기록이 몰려 있어요. 인과관계는 더 확인해야 합니다.”
시간은 계속 줄어들었다. 일곱 구역의 원본 경로를 강제로 회수하기까지 스물일곱 시간이 남았다. 겉으로는 아무도 사라지지 않았고 우편함도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길을 나눌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의 동의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어진다.
연락소의 복도에서는 늦은 저녁 청소가 한창이었다. 종수는 종이컵 하나를 들고 복도 끝 창문 앞에 섰다. 수문 너머 강물에는 여름을 지나온 쓰레기가 걸려 있었다. 그가 스무 해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강은 더 넓었고, 우편함은 돌담이 아니라 나무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아이들은 답장이 오지 않으면 작은 돌을 하나씩 놓곤 했다. 돌이 쌓여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아직 읽을 사람이 없나 보지'라고 말하며 다음 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어른들이 돌을 치웠다.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종수는 그때 아무 말도 못 했다. 사람을 숨기는 일과 사람을 지키는 일이 다르다는 걸 오랫동안 몰랐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오래된 돌 하나를 집어 왔다. 매끈한 표면에는 배 모양의 긁힌 자국이 있었다. 누가 남긴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종수는 돌을 우편함 안에 넣지 않고 자기 책상에 올렸다. 이 돌이 있었음을 자기 손으로 증명하면 될 것 같았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화면에는 현우의 이름이 떴다. 종수는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아직 자기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몇 개 남아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현우가 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우편함에 새 편지가 들어왔습니까?”
“있소. 그런데 이상하오. 발신자는 없고 수신인이 나요.”
가은이 스피커를 켜 달라고 했다. 종수는 봉투 겉면을 읽었다.
'우편함의 마지막 수거인에게. 네가 지킨 것은 편지가 아니라 문이었다.'
그리고 아래 작은 붉은 숫자.
[소멸 예정 26:58:10]
현우는 눈앞에 떠오른 이름을 똑똑히 보았다.
임종수.
스무 해 동안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지켜 온 노인의 이름이 처음으로 붉어져 있었다.
제7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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