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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73화
PAYLUA ORIGINAL · 제73화

73화. 지하에 남은 답장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3,343자

오프라인 책장
무전기의 녹음 장치는 고장 난 상태였다. 주영이 수신기를 분해해 복원하는 대신 먼저 통신 상태를 확인했다. 전원이 따로 연결되지 않은 낡은 기기에는 아직 수신 표시등이 켜져 있었다. “누구십니까?” 가은이 물었다. 치직거리는 잡음이 길게 이어졌다. “내 이름은 여기서 말하지 않겠어요. 듣고 있다는 것만 알려 주려고요.” “알겠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 보관함을 열려면 ‘받았다’라고 입력하지 말아요. 그냥 확인하러 왔다고 해요. 두 말은 달라요.” 현우는 무전기를 노려보았다. 스무 해 전 아이의 목소리처럼 들리면서도 낮게 갈라지는 성인 여성의 음성이었다. 누구인지 기억해 내려 애쓸수록 머릿속에서는 서로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붉은 장갑, 노란 실, 젖은 계단. 거기서 떠오른 얼굴은 하나도 분명하지 않았다. “08입니까?” 현우가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번호를 쓰는 사람이라고 해 두죠. 사람의 이름 대신 번호를 묻지 않는 당신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무전은 거기서 끊겼다. *** 다음 날 아침 가은은 지하 보관함 조사 절차를 다시 점검했다. 전산 접수와 물리적 열람을 분리할 수 있다는 시설 직원의 확인이 있었다. 독립 입회인 두 명, 시설 안전 책임자, 기록 담당자가 동행하고 출입 시각은 종이 대장과 별도 카메라에 동시에 남기기로 했다.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누군가 귀환했다는 증거로 쓰지 않는다는 문구도 조서 첫머리에 넣었다. 계단은 낮고 가팔랐다. 벽을 타고 차가운 습기가 흘렀고, 바닥에는 낡은 선로처럼 생긴 배관 두 줄이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해가 뜬 뒤인데도 지하 공기는 한밤중처럼 서늘했다. 현우는 마지막 계단에서 걸음을 멈췄다. 머리 위로 하얀 글씨들이 떠올랐다가 꺼졌다. [발송 대기] [수신 확인] [반송 보류] 모두 사람이 아닌 서류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글씨가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대신한다면, 몇 번의 클릭만으로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보관실 안에는 철제 선반 일곱 개가 있었다. 선반마다 우편 자루 하나와 단단한 금속함이 놓여 있었다. 위치를 가리키는 표지는 1구역부터 7구역까지. 종수의 말대로 이곳은 주소를 보관하던 곳이 아니라 편지를 중계하던 곳이었다. “사람들 이름은 없습니다.” 주영이 말했다. “대신 답장 상태만 있어요.” 가은은 일곱 함의 봉인을 확인한 뒤 시설 소유자의 허가 범위 내에서 외부 상태표만 촬영했다. [1구역: 수신 대기] [2구역: 답장 거부] [3구역: 전달 보류] [4구역: 경로 상실] [5구역: 수신인 미확인] [6구역: 수거인 교체] [7구역: 기록 미연결] “이걸 전부 복원했다가,” 태경이 말했다. “누가 원하지 않는 연락까지 받으면 어떡하죠?” “그래서 연결을 고치는 것과 전달하는 것을 따로 해야 해요.” 가은이 말했다. 그 말에 현우는 생각에 잠겼다. 끊긴 길을 고친다 해도 모든 사람이 그 길로 걸어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길이 있다는 사실과 그 길로 누군가를 끌어내는 일은 전혀 달랐다. *** 가장 왼쪽 금속함에는 작은 투명창이 있었다. 창 안쪽으로 낡은 종이가 보였지만 문자 대부분은 가려져 있었다. 시설 직원이 오래된 분류표를 꺼내 주었다. 겉표지에 '미확인 수신인을 위한 답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용을 열어 봐도 되겠습니까?” 가은이 물었다. “기관이 보관 중인 분류표까지만요. 편지는 발송자의 권한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금속함을 열지 않았다. 대신 분류표에 적힌 발송·수신 규칙을 기록했다. 일곱 구역은 원래 단순한 우편망이었다. 답장을 원하지 않는 사람의 편지는 보류되고, 보류 이유는 외부에 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뒤 추가된 규칙은 모든 미수신 상태를 '귀환 요청'으로 바꾸고 있었다. 그 문장의 승인란에는 사람 이름 대신 [02]만 찍혀 있었다. “02는 이 시스템을 망가뜨린 게 아니라,” 주영이 말했다. “원래 있던 보호 장치를 반대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현우가 물었다. “이걸 원래대로 돌리면 회수를 멈출 수 있어요?” “단순 복구로는 안 됩니다. 지금 운영 중인 다른 시스템들이 잘못된 결과를 받아 쓰고 있거든요. 원본과 현재 규칙의 차이를 입증해야 합니다.” 가은은 분류표와 규칙 변경 대조표를 별도로 봉인했다. 입증이 끝나기 전에는 서둘러 모든 우편함을 열지 않기로 했다. *** 오후 세 시에 첫 이상이 발생했다. 보관실의 등 하나가 꺼지고, 오른쪽 벽에서 작은 기계음이 났다. 주영의 단말기에 원격 접속 요청이 들어왔다. [관리자 02: 조사원 출입 확인] [귀환 7건 완료로 기록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주영은 네트워크 연결을 끊었다. 그런데 글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현우의 눈앞에만 떠올랐다. 붉은 글자였다. [확인하지 않으면 보존 기한 내 전량 회수] 현우가 눈을 감았다 떴다. 글씨는 선반마다 달린 태그 위로 옮겨 다녔다. 종이의 상태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협박이었다. 현우는 벽에 붙은 종이 대장에 펜으로 적었다. '오늘 확인한 것은 물리적 보관함 7개이며, 수신인의 귀환 여부가 아니다.' 그 문장을 쓰자 붉은 글씨가 한 순간 흐려졌다. 마치 전산에 남지 않는 기록을 시스템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지하에서 내려온 뒤 태경은 계단 난간에 잠시 등을 기댔다. 어떤 냄새가 갑자기 기억났다. 희미한 소독약 냄새와 젖은 교복 냄새였다. 그는 돌아온 뒤 처음 몇 주 동안 병원 복도를 두려워했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 보관함의 냄새가 그때와 닮아 있었다. “괜찮아요?” 나경이 물었다. “갑자기 어지러워서요. 근데 기억이 돌아온다고 좋아할 일인지 모르겠네요.” 나경은 카메라를 내렸다. “촬영 안 하고 있어요.” 태경은 짧게 웃었다. 누군가 자신을 기록한다는 말을 들으면 긴장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 자신이 기록을 원할 때와 원하지 않을 때를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기뻤다. “저는 돌아와서 자꾸 누군가를 실망시켰어요. 모두가 제가 잃어버린 기억을 한꺼번에 말해 주길 바랐거든요.” “그건 태경 씨가 감당할 일이 아니죠.” “그런데 저도 가끔 기대해요. 어느 날 누가 문을 열어 주면 제가 빠뜨린 시간이 다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잠시 조용해졌다. “안 돌아와도 내가 살았다는 사실은 없어지지 않겠죠?” 나경은 대답 대신 손에 든 따뜻한 물병을 건넸다. 태경이 물병을 받아 들고 천천히 한 모금 마실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단 위에서 시설 직원이 그를 불렀다. “모두 올라오셔야 합니다. 수문 방류 점검 시각이 앞당겨졌답니다.” “누가 변경했습니까?” 가은이 물었다. 직원은 출입 대장을 뒤집어 보였다. 변경 승인칸에는 그날 지하에 오지 않은 사람의 서명이 찍혀 있었다. 이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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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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