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함 00 앞에서 현우가 처음으로 확인한 것은 발신인도, 날짜도 아니었다.
봉투의 접힌 면에 찍힌 물자국이었다. 손바닥만 한 종이에 물방울이 세 번 닿았다 마른 흔적이 있었다. 스무 해 전 아이들이 편지를 보낼 때 쓰던 표식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옛날 편지라는 증거는 아니었다. 종이가 새것이었기 때문이다.
“읽으시겠습니까?” 임종수가 물었다.
현우는 대답 대신 봉투를 가은에게 보여 주었다. 뒷면에는 [등록 08]이라는 네 글자, 앞면에는 '아홉 번째에게'라는 문장만 있었다. 주소를 알아내라는 부탁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라는 조건도 없었다.
“열람 대상은 나인 것 같아요.”
“그렇다고 서둘러 읽을 필요는 없죠.” 가은이 대답했다. “다만 삼 일짜리 회수 기한이 걸려 있어요. 그 사실까지 감안해서 결정하세요.”
현우는 봉투의 접착 부분을 천천히 뜯었다.
'아홉 번째에게.'
'지하 문을 열지 마. 적어도 두 개의 시간이 일치하기 전에는.'
첫 줄을 읽자 종수가 종이배를 내려놓았다.
'하나는 문이 열린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그 문에서 누군가 무사히 돌아온 시각이야. 관리자 02는 앞의 시각만 남겨 놓았어. 문을 열었다는 기록을 구조가 끝났다는 기록처럼 쓸 거야.'
현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02가 늘 그랬다. 편지를 보낼 수 있다는 말을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동의로, 가족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만나겠다는 허락으로 해석했다. 이번에는 문이 열린 기록을 모든 사람의 귀환으로 바꾸려 한다는 뜻이었다.
종이 아래쪽에는 부드러운 연필로 그린 빨간 장갑 하나가 있었다. 장갑은 어린아이 손보다 조금 컸고, 손목에는 노란 실이 묶여 있었다.
'나는 08을 사용한 적이 있어. 하지만 그 번호가 지금 누구의 이름인지는 네가 정하지 마. 내 말을 믿어도 좋고 의심해도 좋아. 다만 이 경고가 진짜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아래에 시간을 남길게.'
이어 두 줄이 적혀 있었다.
[문 개방 06:14:08]
[생환 확인 06:22:31]
“여덟 분 이십삼 초.” 주영이 계산했다.
“이 두 번째 시간이 어디 기록돼 있습니까?” 가은이 물었다.
종수는 고개를 저었다.
“제게 있던 옛 근무표에는 문이 열린 시각만 남아 있어요. 사람 하나가 더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걸 증명할 서류는 보지 못했습니다.”
현우가 다음 장을 꺼냈다.
'이 둘을 대조하지 않으면 지하 보관함은 모든 수신인에게 같은 답장을 보낼 거야. **전원 귀환 완료.** 그 말은 거짓말이야.'
가은은 노트에 시간을 적었다. 의뢰인의 편지라고 해서 바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확인 가능한 숫자를 남겼다는 점은 중요했다.
***
오전 아홉 시가 되자 시설 담당자가 지하 보관함 앞의 안전 상태를 보고했다. 통로에는 오래된 배관과 잠금장치가 있었지만 큰 구조적 위험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주영이 받은 설비 자료에는 이상한 항목이 하나 있었다.
[출입 완료 시 접수 상태 자동 갱신]
“문을 열면 그 자체로 무슨 처리가 된다는 거죠?” 태경이 물었다.
“시스템상으론 그렇습니다.” 주영이 말했다. “누가 들어갔는지는 확인하지 않고, 문이 열렸다는 사실을 수신이 완료됐다는 신호로 씁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열면 안 되네요.”
“그냥 잠가 놓는 것으로 끝나진 않아요. 02가 원격으로 열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주영은 시설 직원의 승인을 얻어 자동 연결선을 분리했다. 장비를 파손하지 않고도 원격 명령을 보류할 수 있었다. 그사이 가은은 관할 기관에 별도 입회인을 요청했다. 이름 하나로 사람을 대신하지 않도록 해 온 일들이, 이번에는 문을 여는 일에도 필요했다.
현우는 하린에게 짧게 연락했다. 발견한 편지의 모든 내용을 일방적으로 쏟아놓지 않고, 하린이 알고 싶다고 한 부분부터 말했다.
“점 두 개를 그린 사람이 편지를 보냈어. 지금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아.”
“그럼 살아 있는 일곱 번째 아이는요?”
“그 아이가 남긴 편지도 진짜인지 검증 중이야. 우리한테 열지 말라는 경고를 한 쪽은 08번이라고 썼고.”
하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빠. 그 사람들이 전부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요.”
“응. 안 그래.”
“그리고 나도 나중에 편지를 보낼 건데, 답이 없으면 답이 없는 거예요.”
현우는 그 말에 작은 웃음을 지었다. 하린은 이 사건의 끝을 누군가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답장을 기다려 줄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먼저였다.
***
점심 무렵 나경이 현장 주변에서 촬영한 영상을 가져왔다. 오전 여섯 시 십사 분, 노란 우산을 든 종수의 뒤편으로 누군가가 지나갔다. 검은 우비를 입은 사람은 카메라를 발견하고 멈춘 듯했지만, 곧 반대쪽 길로 사라졌다.
“혹시 편지 보낸 사람이 아닐까요?” 나경이 물었다.
“모릅니다.” 가은이 말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라면 얼굴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을 수도 있어요. 영상이 있다고 신원을 추적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현우는 영상 끝에 찍힌 작은 손동작을 봤다. 검은 우비의 손이 난간을 짚는 순간 장갑 손목에서 노란 실이 흔들렸다.
그가 편지의 그림을 꺼내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 번호는 표시되지 않았다. 대신 화면 가장자리로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문 개방 시각 확인]
[생환 확인 시각: 기록 없음]
[동일 처리까지 51:17:44]
현우가 주영에게 화면을 보여 주자 주영의 노트북에도 같은 문구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우편함의 경고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다음 문장은 더 짧았다.
[여덟 분 이십삼 초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우는 편지의 여백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종이배 그림의 꼬리 부분이 두 번 덧그려져 있었다. 어린 시절에도 누군가는 배의 뾰족한 끝을 잘 접지 못해 여러 번 선을 그었다. 그는 자신이 그랬는지, 옆에 있던 아이가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은 장면을 남기고도 사람을 지웠다.
종수가 물었다.
“겁납니까?”
“네. 누군가 지금도 저를 시험하는 것 같아서요.”
“편지는 시험지가 아니오. 보낸 사람이 자기 말을 건네는 방법일 뿐이죠.”
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종수는 문 앞에 서서 끼고 있던 작업용 장갑을 벗었다. 손가락은 오래된 관절염 탓인지 조금 굽어 있었다. 그 손으로 스무 해 동안 봉투를 세고, 닫힌 문을 두드리고, 아무도 답장하지 않는 날을 견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한 일 중 절반은 기다리는 일이었소. 처음에는 기다리는 것도 일이라는 걸 몰랐지.”
현우는 문이 열리는 시각과 사람이 돌아온 시각 사이를 다시 떠올렸다. 여덟 분 이십삼 초는 기계가 멈춘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누군가의 대답을 기다린 시간일 수도 있었다. 그 시간이 중요하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조금 덜 외로웠다.
현우는 편지를 접었다. 누군가 거짓말을 한다면, 먼저 사라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왔다는 여덟 분의 기록일지도 몰랐다.
제7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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