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새벽, 하린은 자기 이름을 두 번 적었다. 하나는 공책 표지에, 하나는 손바닥 크기의 편지지에.
첫 번째 이름은 자신이 쓰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는 누군가 읽을 수도 있는 글이었다. 하린은 둘 다 똑같이 썼지만, 편지지의 이름 밑에는 작은 문장을 덧붙였다.
'지금 내가 쓰는 이름.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신 답해도 된다는 뜻은 아님.'
현우가 그 문장을 보고 물었다.
“누가 알려 준 말이야?”
“제가 생각했어요. 이름이 같으면 사람이 같아진다는 말을 계속 들었잖아요. 그게 아니라고 적어두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네가 꼭 증명해야 할 책임까지 있는 건 아니야.”
“알아요.” 하린은 웃었다. “그래도 이건 제 편지니까요.”
그녀는 전날부터 보관해 둔 종이와 새 편지지를 나란히 놓았다. 첫 번째 편지는 문 안쪽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아이에게 쓰고 싶었다. 두 번째는 자기 자신에게 쓰고 싶었다. 스무 해 전 달력에 얽힌 사정을 나중에 알아내더라도 오늘의 자신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두 번째 편지지를 뒤집는 순간 뒷면에 아이 글씨가 보였다.
'오늘 내 이름이 뭐여도 괜찮아. 대신 나를 찾으러 오는 길은 남겨 줘.'
하린은 글씨를 곧바로 자기 것이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종이를 현우에게 보여 주고, 사진으로만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
서림은 옛 서람초의 두 출석부를 나란히 보고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당시 직접 작성한 것은 오른쪽 전달자 장부의 마지막 두 줄이었다. 이름 대신 물건을 적은 방식이 보호 대상과 외부 전달자를 분리하기 위한 임시 조치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내가 그날 적은 '09'는 문 앞에서 기다린 아이였어요.”
“현우죠.” 가은이 물었다.
“제가 본 아이가 현우 씨였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앞의 08이 누구였는지는 제 기억만으로 확정하지 않겠습니다.”
정연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교사는 일치하는 사실과 기억이 다른 부분을 각각 적었다. 07의 가등록 호칭은 민하린이었다. 그 호칭을 빌려준 아이는 문 밖에 있었다. 서림은 자신이 08을 직접 기록하지 않았고, 나중에 번호가 덧붙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제 일곱 번째 아이 이름을 빼 줘야 하나요?” 현우가 물었다.
서림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는 그 이름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살아남았을지도 몰라요. 내가 적었다고 내가 지울 권한까지 있는 건 아닙니다. 임시로 시작된 이름이 지금도 그 아이가 원하는 이름일 수 있죠.”
현우는 생각에 잠겼다. 빌려준 물건을 돌려받는 일처럼 이름도 주고받을 수 있을까. 한 사람이 그 이름을 여전히 좋아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에게 같은 이름을 쓰는 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문제인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시스템이 그 둘을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선택까지 합쳐 버리는 일이었다.
가은은 출석부의 다른 목적을 확인하는 진술서를 마련했다. 현존하는 문서와 증인 말이 일치하는 범위만 적었다. 원래 사람을 구분하던 등록 구조로 되돌릴 근거가 생겼다.
그 사이 주영은 제0분기 심사에 '이름 반환'이라는 항목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신 오래된 구형 항목 하나가 남아 있었다.
[호칭 관계 해제 / 생존 기록 보존]
“이거예요.” 그는 말했다. “이름을 뺏는 게 아니라 둘의 연결을 끊는 겁니다. 각자 자기 기록을 유지한 채로요.”
***
검증 절차는 예상보다 길었다. 관리자 02는 화면에 이름 두 개가 같으므로 두 사람이 같은 존재라는 문장을 반복했다. 주영이 장부의 역할 차이를 제출하자, 02는 증인들 중 한 명이 과거 기록을 잘못 작성했다는 사실을 들이밀었다.
'오류를 범한 사람의 증언을 믿겠습니까?'
“증언만 믿는 건 아닙니다.” 가은이 대답했다. “종이 원본 두 권, 도서대출 장부, 접수기의 이전 규칙, 별도 기기에서 확인된 음성 기록을 비교했습니다. 서로 다른 자료가 같은 구조를 가리키고 있어요.”
'어느 쪽 아이가 진짜 민하린입니까?'
하린은 그 질문을 들었다. 그리고 당당히 말했다.
“둘 중 하나만 진짜여야 할 이유가 없어요.”
잠깐의 침묵 뒤 화면 아래로 다른 색의 문구가 나타났다.
[호칭 관계 해제 신청 접수]
[당사자 의사 대조 필요]
“저는 제 이름을 쓰고 싶어요.” 하린이 말했다. “그 애가 계속 그 이름을 쓰고 싶다면 그건 그 애가 결정할 일이에요. 대신 제 말을 그 애 말로 기록하지 마세요.”
가은은 하린의 말을 기록해도 되는지 다시 확인했다. 하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음성이 직접 입력됐고, 작성 시각과 입회인이 남았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응답은 없었다. 더는 누구도 대신 '동의'라고 누르지 않았다. 화면은 한동안 기다리다가 항목 하나를 더 표시했다.
[보호 대상 07 / 현재 의사 확인 경로: 별도 유지]
[07 의사 미확인 상태에서 08 및 현 수신자 권한 병합 금지]
두 기록을 나누는 일에 다른 아이의 실명이나 현재 위치가 필요하지 않았다. 일단 병합 명령이 취소됐다.
[호칭 관계: 분리 완료]
[두 출석부: 개별 보존]
[보호명 07: 원래 자료 유지 / 당사자 확인 대기]
하린의 머리 위에 아주 잠깐 흰 글씨가 떠올랐다.
[민하린]
붉은 숫자는 없었다. 현우가 이름을 읽자 하린이 미소를 지었다.
“전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응. 근데 지금은 네가 보이네.”
“원래도 저 여기 있었는데.”
현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린이 옳았다. 기록이 늦게 알아차렸을 뿐, 그녀는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
***
그날 저녁 서람시 기록관에는 이름 없는 봉투 하나가 도착했다. '종이배를 보내고 싶으면 먼저 물어보라'는 문장 아래 작은 배 두 척이 그려져 있었다. 점 하나와 점 둘은 여전히 달랐다.
정연실이 봉투를 열지 않은 채 하린에게 사진을 보여 주었다. 하린은 첫 편지를 발송할지 그 자리에서 결정하지 않았다. 대신 봉투의 발신 시각을 확인했다.
오늘 오후 다섯 시 십사 분.
“이건 스무 해 전 소식이 아니네요.”
“그렇지.” 정연실이 대답했다.
봉투 뒤에는 새 문장이 있었다.
'어제 네 꿈에 있던 문은 맞아. 하지만 네가 돌려주려고 하는 건 이름이 아니야.'
그 아래에는 '00번 우편함'이라는 이름과 다음 날 새벽 접수 시간이 적혀 있었다.
하린은 편지지의 빈칸을 오래 바라봤다. 이름을 빌려 간 누군가가 지금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했다.
“그 사람, 직접 만날 수 있을까요?”
현우는 대답했다.
“그 사람이 원한다면. 이번엔 그 사람 말을 들으러 가야지.”
제6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