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호의 출근 기록이 지워지는 동안, 펌프장에 남은 사람들은 두 방향으로 움직였다. 시설 직원들은 안전 절차대로 작업 구역을 폐쇄하고 마지막 목격 위치를 확인했다. 현우와 가은은 출입 기록부를 사진으로 남기고, 관리자의 허가를 받아 폐기된 보조 통신실 앞까지 갔다.
문 앞에는 물이 없었다. 그러나 문틈 안쪽에서 젖은 신문 냄새가 났다.
“안에 누가 있습니까?” 가은이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현우에게만 낮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 뒤에 노명호의 이름이 아주 작게 나타났다.
[노명호 / 통신 경로로 임시 이동]
[남은 시간: 00:11:08]
이름은 사람이 아니라 문 위에 걸려 있었다. 현우는 전에 본 적 없는 표시라고 설명했다. 가은은 즉시 시설 구조 담당자에게 통신실의 내부 구조를 물었다. 철문 뒤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과 장비 통로가 구분돼 있었다. 오래된 통풍구를 통해서는 외부와 대화할 수 있었다.
“명호 씨! 들리시면 두 번 두드려 주세요!”
안에서 둔탁한 소리가 두 번 났다.
“움직일 수 있습니까?”
한 번.
그들이 정해 둔 신호에 따르면 대답은 '아니오'였다. 현우는 문손잡이에 손을 댔다가 멈췄다. 함부로 열었다가 물길이나 장비를 작동시킬 수도 있었다. 전문가가 해제하는 동안, 그는 통풍구 앞으로 다가가 노명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지금 구조팀이 오고 있습니다. 듣고 있으면 한 번 더 두드려 주세요.”
다시 두 번 울렸다. 규칙대로라면 부정이었다. 현우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났다. 명호가 자신을 듣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태경이 팔찌를 가져왔다. 작은 푸른빛이 철문 앞에서 흔들리더니 문 안쪽에 두 개의 그림자를 비췄다. 한쪽은 작업복을 입은 남자였고 다른 한쪽은 현우의 얼굴을 한 사람처럼 보였다.
“저게 02군요.” 태경이 말했다.
“잠깐.” 현우가 손을 들었다. “현실에서 사람이 둘 있다는 뜻은 아닐 수도 있어. 그림자인지 기록인지 먼저 보자.”
그때 내부 스피커에서 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명호 씨를 대신해서 승인했어. 문을 열어.'
현우는 말을 잃었다. 자신이 한 적 없는 말이었다. 음성만 듣고 있었다면 본인조차 깜빡 속았을 것 같았다.
“저는 승인한 적 없습니다.” 그는 또렷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제 것입니다만, 제가 지금 한 말이 아닙니다.”
02가 웃었다.
'당신 얼굴과 목소리를 쓰는 게 이렇게 쉽다니. 사람들이 당신 말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겠죠.'
가은은 녹음이 재생되는 시각과 직접 확인한 현우의 위치를 각각 기록했다. 신분 도용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피해자 한 사람이 직접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우스우면서도 무서웠다.
***
구조팀이 도착했을 때 명호의 시간은 오 분 남짓이었다. 현장 책임자는 구형 통신실의 단전 상태를 확인한 뒤 비상 개방 장치를 작동했다. 문은 반쯤 열리다 걸렸다. 그 틈 사이로 명호의 손이 보였다. 손가락 하나가 철판에 끼어 있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곧 꺼내 드립니다.”
명호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실제로 안에 있었다. 그리고 현우에게만 보였던 다른 그림자는 사람의 실체를 갖지 않은 채 벽의 오래된 감시 화면 속에 남아 있었다.
태경이 스피커 전원을 분리하자 현우의 목소리로 된 가짜 승인문이 사라졌다. 대신 시설 담당자가 문을 고정하고 구조팀이 명호를 밖으로 이끌었다. 구급대가 손을 처치했다. 붉은 숫자는 00:01:07에서 멈춰 서더니 천천히 희미해졌다.
명호는 구조차에 오르기 전 말했다.
“그 안에서 누가 나를 부른 줄 아세요? 스무 해 전 같이 일하던 동료 목소였어요. 죽은 사람이 문을 열어 준다고 했지.”
현우는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죽은 동료가 실제로 왔다고 믿을 근거도 없었다. 가짜 현우의 목소리가 조금 전 자기 귀에 들렸으니까.
“말을 걸었을 때 대답하셨어요?”
“안 했어요. 이상하게도 이름을 부를 때마다 더 가까이 오는 것 같아서. 대신 벽을 두드렸죠.”
현우가 고개를 숙였다. 스피커가 흉내 낸 신호와 실제 사람의 응답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
사건이 끝나자 가은은 두 출석부를 별도로 보존하겠다는 공문을 정식으로 제출했다. 그런데 문서 접수 내역에 그녀보다 먼저 서명한 사람이 있었다.
[윤서림 / 임시 관리 권한 신청]
[승인 요청 시각: 오늘 14:13]
서림은 은곡역에서 마지막으로 통화한 뒤 이런 요청을 한 적이 없었다. 가은이 직접 확인했다. 서림은 잠시 화를 참듯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제가 09를 잘못 적었다고 자백했죠. 그랬더니 그걸 근거로 '잘못을 고칠 권한'까지 저한테 있다는 서류가 나왔나 봐요.”
“서명하신 적 없습니까?”
“없어요. 제 필체를 흉내 냈을 겁니다.”
주영은 신청서에 찍힌 도장이 스무 해 전 당직표의 사진에서 잘려 나온 이미지와 같은 픽셀 배열이라고 말했다. 실제 잉크의 번짐과 종이 눌림은 없었다. 신청서는 종이 원본을 스캔한 것이 아니라 사진 속 도장 이미지를 재사용한 것으로 보였다.
“02가 과거의 잘못을 현재 권한처럼 포장했군요.” 가은이 말했다.
서림은 답했다.
“제가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누구를 대신해서 새로 결정할 권한은 없어요.”
그녀는 자신의 진술을 다시 제출했다. 이번에는 가짜 신청서와 별도의 방식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원본의 변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도 명시했다. 주영은 검증 정보를 원본과 분리해 보존했다.
가은은 하린에게 연락했다. 아이는 자신이 쓴 답장을 여전히 책상에 놓아두고 있었다.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도 될까?”
“네. 근데 이름을 빌려간 애가 나쁜 애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지 않을게.”
가은은 문 앞에서 사람을 꺼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화면 속 현우의 목소리가 가짜였다는 부분에서 하린은 울컥했다.
“이름을 남이 쓰면 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니. 이름을 부르는 건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한 일일 수 있어. 문제는 그 이름을 가지고 그 사람인 척 결정하는 거야.”
하린은 자기 종이를 다시 펼쳤다. 첫 줄에 '안녕'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 한 문장을 보탰다.
'네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지 나중에 물어볼게.'
***
밤 열한 시, 서람시 북부 우수관 시스템의 화면에 새로운 경고가 나타났다. 외부 입력은 격리됐고 안전 센서는 정상 작동 중이었다. 그런데 실종 사건 기록을 관리하는 별도의 자료망에서 일곱 점이 동시에 빛났다.
[미연결 구역: 7]
[기록의 빈칸 보전 기한: 18일]
[임시 관리자 02 / 일괄 회수 제안]
현우는 수면 부족으로 따가운 눈을 비볐다. 일곱 구역의 지도가 처음으로 한 화면에 떠오르고 있었다. 점마다 다른 색의 잉크가 번져 있었다.
그중 가장 작은 점의 옆에, 도서대출 장부에서 본 글씨가 나타났다.
[받는 곳: 00번 우편함]
그리고 그 아래, 누군가 붉은 펜으로 새겨 넣은 것 같은 문장 하나.
'주소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누가 처음 했지?'
제6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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