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까지 사십팔 분이 남았다는 표시가 떴을 때, 하린은 울지 않았다. 대신 종이를 한 장 꺼내 책상 위에 두었다.
“그러면 제가 답장을 직접 쓸게요. 이름은 안 쓰고.”
가은이 종이를 보며 물었다.
“어디로 보내려는 거야?”
“아직 몰라요. 하지만 '답장을 받으면 병합'이라는 말은 봉투에 넣어서 저 장치로 보내라는 뜻일 수도 있잖아요.”
주영이 고개를 들었다.
“맞아요. 답장을 쓰는 것과 자동 접수함에 넣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그쪽 수신 경로를 거치지 않으면 병합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요.”
태경은 팔찌의 세 홈을 확인했다. 은곡역에서 쓰였던 두 홈은 회색으로 굳어 있었고, 마지막 홈만 희미하게 빛났다. 그 빛이 봉투가 놓인 방향으로 길게 흔들렸다.
“지금 팔찌는 그 봉투를 '문'이라고 판단해요.”
“열까요?” 하린이 물었다.
“아뇨.” 태경이 말했다. “누가 열라고 했는지부터 확인하죠.”
그동안 하린이 가장 듣고 싶었던 것은 어른의 결정이 아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녀는 종이에 천천히 적었다.
'안녕. 네가 누구인지 아직 몰라. 답장이 늦어도 버린 게 아니야.'
그리고 그 종이를 접지 않았다. 가은이 사진을 찍은 뒤 원본을 하린에게 돌려주었다. 이것은 아직 보내지 않은 편지였다. 편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상대에게 빚을 진 것은 아니었다.
***
폐교의 도서실 옆에는 철제 출석부 캐비닛이 있었다. 시 소유 시설 담당자와 함께 안전이 확인된 복도까지 들어간 주영은 오래된 캐비닛이 다른 방의 전선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출석부를 보관한 장치가 아니라 출석부를 전자화하던 시험 설비였다.
안에는 종이 장부 두 권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왼쪽 것은 정연실이 기억하는 출석부와 같았다. 일곱 아이의 이름 또는 임시 호칭이 적혀 있었다. 오른쪽 것은 겉표지부터 달랐다.
'전달자 출석 확인 / 개인정보 미기재'
가은은 표지부터 촬영하고 정연실에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오른쪽 출석부에는 이름 대신 그날 들고 온 물건이 적혀 있었다. '우산', '빨간 장갑', '종이배'. 이름을 적지 않음으로써, 누군가 찾아오고 돌봐 주었다는 사실만 남기려 했던 기록이었다.
그러나 중간 장에 누군가 붉은 볼펜으로 덧씌운 숫자가 있었다.
[등록 07: 민하린]
[등록 08: 민하린]
같은 이름이 두 번 쓰여 있었다. 왼쪽 장부의 07과 오른쪽 장부의 08 위에 말이다.
“이건 출석이 아니라 연결 관계죠.” 주영이 말했다. “07은 도움을 받은 사람, 08은 도움을 전달한 쪽일 수 있어요. 두 장부를 합쳐 버리면 역할이 사라집니다.”
“08이 누군지 확정할 수 있나요?” 현우가 통화로 물었다.
“아뇨. 누군가 숫자를 나중에 덧쓴 흔적이 있으니까요. 다만 두 칸이 원래 다른 용도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순간 도서실의 오래된 스피커가 켜졌다. 전기가 연결되지 않은 제품이었다.
'수신자 정보 불일치. 최종 인원 수 일치 여부를 확인하십시오.'
기계 음성에 이어 또 다른,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명단을 줄이십시오.'
가은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것은 시스템의 중립적인 안내가 아니었다. 누군가 인원 수를 줄이는 일을 명령하고 있었다.
“현장 통제 부탁합니다.” 그녀가 시설 관리자에게 말했다. “누구도 이 장치 앞에 서명하지 않도록요.”
***
집에서 기다리던 하린은 현우의 영상통화에 나타난 두 출석부를 보았다. 오른쪽 장부의 '빨간 장갑' 칸을 보자 그녀는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저는 빨간 장갑을 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현우는 흥분하지 않았다. 빨간 장갑은 오래전 사진에도 있었고 은곡역에서 유리의 가족사진에도 나왔다. 하나의 물건이 여러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 장갑을 네가 가졌다는 기억이야, 아니면 누가 가지고 있는 걸 봤다는 기억이야?”
“음…… 손이 추웠어요. 근데 장갑은 제 손에 안 맞았어요. 한쪽이 너무 컸어요.”
하린은 잠깐 침묵한 뒤 말했다.
“장갑 안쪽에 작은 종이가 있었어요. 누가 '물이 빠지면 문 앞에 두고 가'라고 썼어요.”
정연실이 갑자기 숨을 삼켰다.
“그 문장. 나는 출석부에 적지 않았는데.”
“그러면 어디서 들으셨어요?”
“수문 관리소에 연락하던 전화에서.”
가은은 오른쪽 장부의 마지막 쪽을 넘겼다. '종이배' 다음 행에 비어 있는 칸이 있었다. 아래에는 오래된 전화번호가 인쇄돼 있었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관제소 내선이었다.
주영이 내선을 확인했다. 외부 발신은 불가능하지만, 관제소 내부에서 아직 살아 있는 회선이 있다고 했다. 자동 병합을 중지하려면 두 장부가 다른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전달할 통로가 필요했다.
“그 번호로 직접 전화해 보면 안 될까요?” 태경이 물었다.
“현장 관리자가 허용하면요. 단, 원격 지침을 따라 기계를 조작하진 않을 겁니다.”
카운트다운은 열두 분으로 줄어 있었다. 집에 있는 하린은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른들이 시간을 다투고 있었다. 자신이 더 많은 기억을 떠올리면 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억을 억지로 꺼내려 할수록 머리 위가 맑은 물 속처럼 울렁거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꿈속의 문을 떠올렸다. 문 안에서 아이가 말했다.
'네 이름을 오래 갖고 싶지 않아.'
문 밖의 자신은 대답했다.
'그럼 내가 올 때마다 하루씩만 빌려줄게.'
하린은 눈을 떴다. 손바닥에 연필 자국이 있었다. 분명 아무것도 쓰지 않았는데도, 피부 위에 아주 작은 숫자 두 개가 나타났다.
'07 / 08'
그리고 바로 아래에 새 문장이 떠올랐다.
[동일 수신인 병합: 수동 심사 전환 요청 가능]
하린은 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둘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증명할 다른 방법이 있어요. 제가 이름을 돌려줘야 하는 게 아니라, 두 출석부가 서로 다른 거라고 알려 주면 돼요.”
현우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하린은 작게 속삭였다.
“그때 도와주던 선생님들이요. 아직 남아 있다면.”
제6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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