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대출 도장은 오래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만으로 종이까지 오래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가은은 종이를 증거 봉투에 넣기 전에 하린의 동의를 구했다. 종이가 붙어 있던 창문은 하린이 쓰는 방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글씨는 사진으로 남기고 종이는 가져가도 될까요?”
하린은 잠시 생각했다.
“네. 대신 누가 제 창문에 붙였는지 꼭 알아봐 주세요.”
주영은 종이의 물기가 마르지 않도록 따로 보존했다. 잉크 번짐과 도장의 자국을 확인하려면 건조하면서 생기는 변형도 기록해야 했다. 현우는 이런 절차가 답답하지 않았다. 은곡역에서 억지로 빨리 대답을 얻으려다가 사람들이 몰려든 모습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정연실은 사진 속 종이배를 보고 전화 너머에서 짧게 탄식했다.
“도서실에서 썼던 책갈피야.”
“왜 종이배가 책갈피예요?” 하린이 물었다.
“빗물이 학교 안으로 들어왔거든. 바닥에 물이 고이면 애들이 종이를 접어서 띄웠어. 한 아이가 종이배는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주소가 없다는 말을 했지.”
학교 지하에는 배수로가 있었고, 도서실에서 오래된 수문 관리소까지 배관이 이어졌다. 원래는 우수관이었다. 스무 해 전 시설 보수 후 막혔다고 기록됐지만, 도면에는 폐쇄 확인 서명이 없었다.
“배수관으로 종이가 왔을까요?” 태경이 물었다.
“그건 물리적으로 어려워요.” 주영이 대답했다. “창문이 3층인데요. 다만 누군가 그 이야기로 장소를 알려 주려는 걸 수도 있습니다.”
가은은 학교와 수문 관리소의 시설 관리자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허가 없이 폐시설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지도로 보면 학교 운동장 뒤쪽을 따라 작은 개천이 흘렀고, 그 끝에서 오래된 수문이 지금의 빗물 펌프장으로 이어졌다.
***
학교는 이미 철거가 예정돼 있었다. 교문에는 출입 통제선이 걸려 있었고, 운동장 한쪽에는 공사 장비가 멈춰 있었다. 정연실은 담장 바깥에서 오래전 교실 위치부터 가리켰다.
“저쪽이 도서실이었어. 창문에 흰 페인트 자국 보이지? 아이들이 종이배를 던지면 창틀에서 걸렸지.”
하린은 건물보다 운동장 끝의 느티나무를 오래 보았다. 물을 주던 화분은 없었지만, 나무 아래에는 누군가 만든 작은 물길이 남아 있었다.
“저기서 누가 빨간 장갑을 말리고 있었어요.”
“기억나?” 현우가 물었다.
“장면만요. 누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어요.”
정연실은 하린을 살피다가 서둘러 말을 보태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낡은 도서대출 장부 한 권을 꺼냈다. 개인 소장품이 아니라 학교 문서 이관 과정에서 누락된 것으로 확인해 담당 기관에 보관 신고를 마친 자료였다.
장부에는 같은 책이 여섯 번 대출됐다가 돌아온 기록이 있었다. 제목은 《강을 건너는 법》. 일곱 번째 대출 칸에는 이름 대신 물결 모양의 연필선이 그어져 있었다.
“이게 07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 정연실이 말했다. “그런데 배를 접은 애는 07이 아니었어. 출석부에 없는 애였지.”
“08입니까?”
“그 숫자를 그날은 안 썼어. 나중에야 생긴 번호야.”
가은은 그 차이를 적었다. 번호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지, 아이들이 서로를 부르던 이름은 아니었다.
그때 학교 관리인의 무전기에서 잡음이 났다. 본부가 수문 관리소의 배수량을 확인하라고 했다. 비 예보가 없는 날인데도 오래된 개천의 수위가 두 시간째 상승한다는 보고였다.
“여기서 물이 오를 이유가 없는데.” 관리인이 말했다.
현우는 배수로 철망을 내려다봤다. 그 아래에서 하얀 것이 둥둥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졌다. 주영이 긴 장대를 이용해 안전한 곳으로 끌어올렸다. 젖은 종이배였다. 배는 최근에 접은 것처럼 선이 선명했다.
종이를 펼치자 안쪽에 두 줄이 있었다.
'지난번엔 네 이름을 하루 빌렸다.'
'이번엔 네가 있는 곳을 묻지 않을게.'
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애가 아직 저를 기억하나 봐요.”
아무도 아이가 현재 살아서 이 종이를 썼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오래전 메시지가 뒤늦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여러 번 보았다. 그러나 배수관 아래에서 바람이 불어 올라오는 소리만은 분명했다. 막혔어야 할 관이 열려 있었다.
***
시설 담당자가 도착해 안전선을 넓혔다. 담당자는 최근 세 차례 알 수 없는 자동 개폐 요청이 들어와 차단한 일이 있다고 했다. 발신 시스템명은 '서람 수문 관제 보조'였다. 폐기된 지 십구 년 된 장치 이름이었다.
주영은 기록을 전달받고 손가락으로 시각을 짚었다.
“첫 번째 요청이 은곡역의 강제 개방 시도와 같은 분에 들어왔어요.”
“02가 물길까지 열려고 한 건가요?” 하린이 물었다.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서로 연결된 시도를 한 사람이 있을 수 있죠.” 가은이 말했다.
하린은 종이배를 다시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젖은 종이는 이미 보존 봉투에 들어가 있었다. 현우가 사진을 확대해 보여 주자 배의 안쪽에서 처음엔 보이지 않던 글씨가 나타났다.
'받는 곳: 00번 우편함'
그 아래에는 장소 이름이 없었다. 대신 수문을 닮은 간단한 그림 하나가 있었다. 수문의 철문 아래에는 양쪽으로 갈라진 물길 두 개가 표시돼 있었다.
정연실은 그림을 본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건 그 애가 그리던 문이 아니야.”
“누구요?”
“이름을 빌려준 애 말고, 빌려 간 애.”
그녀는 두 물길 가운데 오른쪽을 가리켰다.
“우린 저걸 '마른 강'이라고 불렀어. 스무 해 전엔 물이 흐르지 않았거든. 그쪽으로 종이배를 보내면 누군가 반드시 주워 갔지.”
“누가요?” 현우가 물었다.
정연실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은 기억나지 않아. 대신 종이배를 주워 간 사람은 늘 답장을 보냈어. 한 번도 아이 이름을 적지 않은 채로.”
하린은 차가워진 자기 손을 맞잡았다.
“그럼 그때도 먼저 물었네요.”
현우는 종이배를 든 사진을 휴대전화에 저장하지 않았다. 관리 기록으로 남기는 일과 개인이 소유하는 일은 다르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대신 수문 관리자와 만날 시간을 적었다. 무엇이 열려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해가 지기 전, 폐교의 도서실 창 하나가 안쪽에서 탕 하고 닫혔다. 아무도 그 건물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은 출입 기록으로 확인된 상태였다. 관리인은 건물을 다시 봉쇄했고, 가은은 원격 카메라 화면을 요청했다.
흐릿한 화면 속 창에는 물결 모양의 글씨가 잠깐 비쳤다.
[수신 거부는 배달 실패가 아니다]
그 아래 새로운 시간표가 켜졌다.
[기록 병합 검토: 04:12:09]
제6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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