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은 꿈에서 본 문을 그린 뒤 지우개를 내려놓았다.
종이에는 손잡이가 두 개 달린 문이 있었다. 오른쪽 손잡이는 둥글었고 왼쪽 것은 아주 작았다. 창문 밖에는 비가 내렸고 문 안쪽에는 누군가 웅크린 그림자가 있었다.
“그 애가 제 이름을 빌려 달랬어요.”
현우가 물었다.
“너는 뭐라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나요. 그래서 더 무서워요. 싫다고 했는지, 좋다고 했는지도.”
하린은 공책 첫 장을 덮었다. 자기 꿈을 듣고 어른들이 또 자신에게 답을 정해 줄까 봐 겁이 났다. 얼마 전만 해도 머리 위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그녀를 보호 대상이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오류라고 불렀다. 두 말 모두 하린의 기분을 물은 뒤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
현우는 은곡역에서 가져온 화면을 식탁에 놓았다.
[등록 00: 기록 재개 요청]
[재개 요청 전달 대상: 민하린]
[최초 보호 요청일: 20년 전]
[현재 수신자 연령: 일치하지 않음]
화면은 단정했지만 네 줄 가운데 확실한 것은 세 번째 줄의 날짜뿐이었다. 수신자 이름이 같다는 것과 수신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다를 수 있었다.
“네가 이 기록을 읽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생각해?”
“아뇨. 누가 저를 찾아온 것 같아요. 허락도 안 받고.”
현우는 화면을 껐다.
“그럼 우선 찾은 쪽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보자. 네가 찾아가야 하는 건 아니야.”
하린은 그 말이 마음에 들면서도 서운했다. 자기가 무섭다는 말만 하면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를 집에 남겨 두려고 했다. 그녀는 공책을 다시 펼쳐 문 오른쪽에 작은 글씨를 써 넣었다. '밖에서도 소리가 들림.' 그리고 왼쪽에 덧붙였다. '열지는 않음.'
***
오전 아홉 시, 서람시청 임시 대조실에 모인 사람은 다섯이었다. 가은은 은곡역 통화 기록에서 공개 동의를 받은 구간만 가져왔다. 주영은 원본 대조소가 남긴 기술 로그를 인쇄했고, 태경은 팔찌에서 깜빡이는 홈의 시각을 별도로 적었다. 나경은 기자 수첩을 펼쳤지만 녹음기는 가방에서 꺼내지 않았다.
“00이 사람일 가능성은요?” 나경이 물었다.
“직무명으로 사용된 기록이 있습니다.” 주영이 말했다. “그런데 이번 요청은 계정 접속 흔적이 아니라 우편물 접수 방식으로 찍혔어요. 누군가 서류를 내고, 시스템이 나중에 전산화한 기록처럼요.”
가은이 종이를 들어 보였다. 첫 줄에는 '받는 이'가 있었고 두 번째에는 '지금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다. 일반 편지라면 필요 없는 칸이었다.
“스무 해 전 이 이름을 쓴 아이가 있고, 지금 같은 이름을 쓰는 하린이가 있습니다. 시스템은 둘을 같은 수신인으로 간주하려는 듯해요.”
태경은 말을 고르다 하린 쪽을 돌아보았다.
“옛날 학교에서 네가 여전히 어린 얼굴로 사진에 남았던 일도 있잖아. 우리가 모르는 시간의 단절이 있을 수 있어.”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도 모르죠. 전 그때 사진 속 애가 저인지, 저처럼 보이는 누군지 확실하지 않아요.”
“맞아.” 가은이 대답했다. “확인하지 않은 걸 네 정체로 정하지 않을게.”
그 순간 시청의 복합기에서 종이가 뽑혀 나왔다. 아무도 인쇄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주영이 전원 케이블을 뽑았지만 마지막 한 장은 끝까지 밀려 나왔다.
[동일 이름 수신자 자동 병합 예고]
[보호명 07 / 민하린]
[현 수신자 / 민하린]
[병합 검토까지 06:00:00]
현우는 그 숫자 위로 붉은 선이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았다. 아직 사람의 이름 위가 아니었다. 종이와 하린이 앉은 의자 사이에 얇은 실 같은 빛이 늘어져 있었다.
하린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실은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의자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처럼 한 차례 떨렸다.
“저기요.” 그녀가 말했다. “만약 저걸 합치면 저는 어디로 가요?”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
정연실에게 전화했을 때, 전직 교사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서람초에 있던 일곱 번째 아이가 '민하린'이라는 가등록 이름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한 바 있었다. 그러나 임시 이름을 어떻게 정했는지는 그 역시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을 빌려주는 날이 있긴 했어.” 마침내 정연실이 말했다. “신원을 잃어버린 아이한테 누가 이름을 나눠 주면 그날만큼은 출석을 부를 수 있었거든. 하지만 그게 좋은 방식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 이름을 빌려준 아이는 누구였습니까?”
“출석부에 적지 않았지. 빌려준 아이까지 기록에서 잡히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그 아이가 밖에 있었나요?” 하린이 물었다.
정연실의 숨소리가 달라졌다.
“어떻게 알았니?”
“꿈에서요. 문 밖에 제가 있었거든요.”
“네가 거기 있었다고 확신하지 마. 그날 문 밖에는 여러 아이가 있었어. 빨간 장갑을 든 아이도 있었고, 우산을 들고 울던 아이도 있었지.”
정연실은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부분을 분명히 했다. 가은은 다음 날 옛 서람초 자료를 함께 살펴볼 수 있는지 물었다. 정연실은 허락했다. 다만 그날 출석부를 아이들에게 보여 주기 전에 자신이 먼저 확인하겠다고 했다.
전화가 끊긴 뒤 하린은 창가에서 오래 머물렀다.
“전 그 애한테 이름을 줬을까요?”
현우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네가 줬다면 그건 네가 고른 일이었는지 물어봐야 해. 안 줬다면 누가 네 이름을 쓴 건지도.”
하린은 창에 비친 얼굴을 바라봤다. 여전히 열세 살쯤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스무 해 전 사진과 똑같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자기 안의 시간은 어디로 흘렀을까.
그때 하린은 비슷한 꿈을 꾼 뒤에 자신이 했던 행동을 하나 더 떠올렸다. 학교 급식실처럼 긴 탁자에 앉아 있었고, 앞에는 따뜻한 미역국이 있었다. 누군가 접시에 자기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숟가락보다 먼저 연필을 집었다. 하린은 종이에 민하린이라고 썼지만, 자기 앞 접시가 아니라 맞은편 접시를 향해 밀었던 것 같았다.
그걸 말하자 현우는 언제나처럼 '그게 사실이야?'라고 묻지 않았다. 대신 그 꿈에서 무서웠던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맞은편 아이가 국을 못 먹을까 봐요. 걔는 아무것도 안 적혀 있으면 밥을 안 준다고 믿고 있었어요.”
하린은 자기가 이름을 빌려준 일이 그 아이를 도운 것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 일을 누군가 허락 없이 영원한 규칙으로 바꿔 놓았다면 억울할 것 같았다. 애초에 배가 고픈 아이에게 밥을 주는 일과, 그 아이가 자기 이름을 포기해야 하는 일은 같은 일이 아니었다.
하린은 공책 여백에 국그릇 두 개를 그렸다. 그릇 하나에만 이름이 적힌 그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두 그릇 사이에 커다란 식탁을 그리고, 그 위에 연필을 하나 더 놓았다.
그때 유리창 아래쪽에 빗물이 한 줄 흘렀다. 마른 날씨였다. 바깥 보도블록에는 햇빛이 있었고 하늘은 맑았다. 그런데 창의 안쪽으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현우는 물방울이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갔다. 유리 아래 걸쇠에 아주 작은 종이 조각이 붙어 있었다.
'종이배는 이름을 싣지 않는다. 도착한 사람에게 묻는다.'
그 글씨는 아이의 것이었다. 그리고 종이 뒷면에는 스무 해 전 서람초의 도서대출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제6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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