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분.
역 안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시계를 보고 있었다. 어떤 이에게는 평범한 오후로 향하는 다섯 분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스무 해를 기다린 사람을 다시 잃을지도 모르는 다섯 분이었다.
현우의 눈앞에 떠오른 붉은 숫자는 이번에는 사람 이름 위에 있지 않았다. 대합실 한쪽, 08번이라고 적힌 금속판과 오래된 시계, 그리고 제0분기 전화기 사이를 한 줄로 이어 놓고 있었다.
[08번 경로 / 강제 개방 예상: 00:04:59]
그는 예전 같으면 표를 들고 뛰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이 붉어졌을 때마다 그 이름을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표는 사람의 의사를 증명하지 못했다.
“서림 씨, 현재 통화가 연결된 분에게 다시 물을 수 있습니까?”
“가능합니다. 다만 이 장치가 대답을 왜곡하지 않도록 다른 수단이 필요해요.”
주영은 분기 장치를 확인했다. 음성 인식 모듈이 '가족과 연락한다'는 말을 '귀환 의사 있음'으로 바꾸고 있었다. 누군가 정책 파일을 수정한 것이다. 기록에는 관리자 02의 임시 규칙이라고 남아 있었다.
가은은 서류를 소리 내어 읽었다.
“'현재의 당사자 의사'와 '가족의 연락 희망'은 다른 항목입니다. 승인되지 않은 규칙이 왜 작동 중이죠?”
대조소의 여성 음성이 대답했다.
'자동 해석 경로가 운영 중인 복구 장치에 복제되었습니다. 관리 권한이 분리돼 있습니다.'
“그 장치만 멈추면 됩니까?”
'오류 경로는 멈출 수 있습니다. 단, 기존의 원본 연결이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을 숨기는 답도, 전부 안전하다는 약속도 아니었다.
“역 안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을 확인해 주세요. 그리고 현재 통화하신 분의 의사를 다른 회선에서 다시 받아야 합니다.”
***
도현은 면담실 밖으로 나왔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유리인 듯했지만 아직 신원을 확정하지 않았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는 그 점에 항의하지 않았다. 다만 현우에게 물었다.
“정말 그 애가 아니라도, 나는 방금 그 사람한테 도움을 준 거겠죠?”
“무엇을 말할지 스스로 정할 자리를 남겨 주셨죠.”
“그럼 이제 그 사람한테서 답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어요.”
도현은 화를 참는 듯 얼굴을 구겼다.
“솔직히 당장 문 열고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래도 참을 겁니다. 내가 못 참으면 그 사람이 또 도망쳐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는 가은에게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거기에는 편지를 보낼 때 사용할 연락 창구가 적혀 있었다. 그의 집 주소는 없었다. 공개용 우편함을 통해 중계하되, 수신자가 수령을 거부하거나 답하지 않을 수 있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법도 있다는 걸 스무 해 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남은 시간은 두 분 사십 초였다.
태경은 팔찌를 장치 가까이 가져갔다. 세 개의 홈에서 마지막 홈만 흐리게 빛났다. 누가 그 팔찌를 사용하도록 권한을 줬는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바로 꽂지 않았다.
“긴급 집행을 멈추는 보류 기능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대조소가 답했다.
'등록 08의 반송 표가 소유자 불명 상태이므로, 보관자는 긴급 오류 보고만 할 수 있습니다. 귀환 승인이나 철회 권한은 없습니다.'
“오류 보고를 하겠습니다. 승인되지 않은 문장이 현재 의사를 바꾸고 있어요.”
팔찌가 짧게 울렸다.
[해석 오류 신고 접수]
[집행 경로 검증 중]
하지만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00:01:57]
가은은 현우를 보았다.
“지금 여기서 원본이라고 믿고 있는 정보 중에 실제 당사자가 확인한 게 있나요?”
현우는 두 가지를 떠올렸다. 한 사람은 오빠와 편지를 주고받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09를 등록했지만 보호자 권한을 위임한 적 없다고 고백했다. 그 밖에는 추정과 자동 해석뿐이었다.
“그 두 사실을 분리해서 보내죠. 과거 표는 제출하지 말고요.”
주영은 전화기의 음성 인식 기능을 끄고, 당사자가 말한 문장을 문자로 직접 읽어 확인할 수 있는 보조 회선으로 바꿨다. 화면에는 여자의 응답을 기다리는 빈칸이 생겼다. 현우는 손을 떼었다. 그곳에 대신 문장을 써 넣을 수는 없었다.
[00:01:09]
잠시 뒤 한 글자씩 문장이 나타났다.
'저는 오늘 은곡역으로 귀환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빠와 편지를 주고받을 방법을 알아보고 싶습니다.'
'현재 위치와 이름의 공개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가은은 수신자에게 이 문장들이 자신의 현재 뜻이 맞는지 다시 물었다.
'맞습니다.'
[00:00:38]
현우는 문장을 대조소에 제출했다. 이 문장은 유리가 누구인지 확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사람이 지금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만 정확히 밝혔다.
02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당신들이 원하는 답이 나왔군요. 하지만 원본 연결은 여전히 위험합니다.'
가은은 대답했다.
“그 위험을 조사하겠습니다. 원하지 않는 귀환을 먼저 시킬 이유는 안 됩니다.”
[00:00:12]
세 번째 표의 코팅막 위로 금이 갔다. 문장이 흐려지며 '돌아가지 않을 권리'라는 글씨가 두 겹으로 갈라졌다. 한쪽에는 새로 인쇄한 잉크, 다른 한쪽에는 어린 글씨를 흉내 낸 흔적이 있었다.
[00:00:03]
현우는 눈을 감지 않았다.
[00:00:00]
정적.
한참 뒤 제0분기 화면에 문장이 떴다.
[08번 강제 개방: 중지]
[가족 연락 요청: 귀환 신청과 분리]
[은곡역 지명 보존: 복구 대기]
[원 발신자 면담: 당사자 요청으로 종료]
***
사람들은 다음 날 은곡역의 이름이 완전히 돌아왔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전광판에는 은곡역이 다시 표시됐다. 승차권 검색에서도 이름이 나왔다. 그러나 오래된 구 운송 분기표에는 여전히 빈칸이 있었다. 가은은 완전 복구라고 발표하지 않았다.
“한 부분은 고쳐졌고, 한 부분은 남아 있습니다. 그걸 같이 기록해 주세요.”
선희는 종이 안내문을 떼지 않았다. 혹시 화면이 다시 지워지더라도 누구나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도록, 일정 기간 임시 안내를 남겨 두기로 했다.
서림은 공개된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가은에게 제0분기 당직표와 자신의 서명 사실을 확인하는 진술서를 보냈다. 자신이 만든 세 번째 표가 어떻게 오류를 일으켰는지 조사하는 데 협조하겠다는 문장도 있었다. 진술서 끝에는 따로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아홉 번째를 적은 사람이 그 아이의 보호자는 아닙니다. 그때의 제 잘못을 기록해 주십시오.'
현우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스무 해 전 어른이었던 한 사람이 이제야 자신이 남긴 빈칸의 의미를 인정했다. 그것으로 과거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새로 고쳐 쓸 수 있는 부분이 생겼다.
도현은 은곡역 우편 창구에 봉투 하나를 맡겼다. 받는 사람 이름은 쓰지 않았다. 대신 담당자가 확인할 수 있는 비공개 중계번호만 적었다. 봉투 안에는 긴 사과문도, 돌아오라는 명령도 없었다.
'밥은 잘 먹고 있니. 나는 아직 여기 있어. 답장하지 않아도 괜찮아.'
봉투를 넣은 뒤 도현은 매점이 있던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그리고 근처 빵집에서 소보로빵 두 개를 샀다. 하나는 자신이 먹고, 하나는 가방에 넣었다. 누구에게 줄지 정해 놓지 않은 빵이었다.
***
서람시로 돌아온 현우는 하린에게 은곡역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모든 비밀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상대가 공개하지 않기로 한 것을 존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역 이름이 잠시 사라졌다 돌아왔고, 한 형제가 편지를 보낼 수 있는 통로를 얻었다는 사실은 말해 주었다.
“그럼 그 사람은 안 돌아와도 되는 거죠?” 하린이 물었다.
“지금은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어.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다시 말할 수 있겠지.”
“좋네요.”
“뭐가?”
“문이 꼭 한 번만 열리는 게 아니라는 거요.”
현우는 웃었다. 하린은 새로 산 공책 첫 페이지에 작은 기차역을 그렸다. 역 입구에는 '내가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봐 주세요'라는 문장이 있었다. 현우가 너무 긴 간판이라고 놀리자 하린은 짧게 고쳤다.
'먼저 물어보기.'
그날 밤 가은이 연락했다. 은곡역 사건으로 서람시의 미연결 여덟 구역 중 한 곳에 있던 노선 정보의 일부가 복원됐다는 보고였다. 일곱 곳은 여전히 끊겨 있었다. 원본 보존 종료까지는 스물하루가 남았다.
“이번엔 원본이 어디에 있었는지 찾았네요.” 현우가 말했다.
“일부만요. 그리고 더 이상한 기록이 하나 생겼습니다.”
가은이 보낸 사진에는 원본 대조소에서 새로 나타난 접수 화면이 있었다.
[등록 09: 마지막 목격자 / 위임 권한 없음]
[등록 08: 반송 보류 / 본인 확인 미완료]
[등록 00: 기록 재개 요청]
현우가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00은 직무명이었다고 했잖아요. 누가 요청한 겁니까?”
“그게 문제예요. 승인 담당자도, 발신자도 비어 있어요. 대신 수신인 칸에 누군가의 이름이 있습니다.”
현우는 화면을 확대했다.
[재개 요청 전달 대상: 민하린]
[최초 보호 요청일: 20년 전]
[현재 수신자 연령: 일치하지 않음]
그는 거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하린을 바라봤다. 하린은 연필 끝을 입술에 대고 작은 역의 지붕을 그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린아.”
“네?”
“너, 이 그림 어디서 본 적 있어?”
하린은 그가 들고 있던 사진을 한번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본 건 아닌데요. 꿈에는 나왔어요.”
“어떤 꿈?”
“오빠가 문 앞에서 기다렸어요. 근데 제가 문 안에 있던 애가 아니었어요.”
현우의 손이 멈췄다.
하린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그 애가 나한테 이름을 빌려 달라고 했어요.”
창밖에서는 평범한 밤바람이 불었다. 하린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아무 이름도 보이지 않았다.
제6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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